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49> '오델로' 실패후 LA행…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49> '오델로' 실패후 LA행…

입력
2008.12.17 06:04
0 0

“반전은 마침내 시작됐다.”

그러나 아직은 누구도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오페라영화 <오델로> 의 흥행 참패로 나는 그 해 겨울을 가족들과 보내지 못했다. 가족들의 마음과 몸이 꽁꽁 얼어붙어 있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모두가 나의 욕망이 빚어낸 쓰라린 흔적들이었다.

1986년 12월 15일, 나는 LA로 향하는 대한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주머니엔 100달러짜리 몇 장이 전부였다. LA공항에서 나를 마중한 사람은 국립극단 극작가였던 전진호 형이었다. 국내에서 치열하게 활동을 하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명동거리를 떠났다. 창작의 자유가 없는 이 땅에 그의 미래를 맡기고 싶지 않다고 홀연히 미 대륙으로 날아가 민주 문화 운동을 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 곳에서 그는 천막장사를 하는 사람들의 기구를 배달해 주는 그야말로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미국을 방문하게 되면 하룻밤은 꼭 그의 지하실 목침대에 누워 그와 밤새 한국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와 그렇게 하룻밤 살을 맞대고 자야 고급호텔에 머물고, 고급음식을 먹고 다니며 생기게 되는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고물 도요타 용달차는 고속도로를 캐딜락 못지않게 잘 달렸다. 호텔비도 없는 나로서는 당분간 그의 지하창고 방에 짐을 풀기로 하였다. 우선 미국 운전면허증을 따기 위해 그의 용달차를 몰았다. 물론 짐짝 나르는 것도 내 몫이었다. 12월 18일 아침, LA타임지 위크앤드 엔터테인먼트 판을 읽던 그가 한 영화광고 페이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영화 한 번 보지 그래.” 영화평이 아주 좋다는 것이었다. <플래툰> 한 병사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고 쓰러지는 모습이 눈에 바로 ‘꽂혔다’. 평론가들의 평점이 별 다섯 만점. 전진호 형은 ‘오늘은 샌디에이고 장거리 배달’이니 하루 영화나 보고 지내라며 아침 일찍 나를 영화관에 떨어뜨려주었다.

흑인과 멕시칸이 사는 LA 끝 동네 영화관. 단관 개봉이었다. 신인감독, 신인배우의 영화는 세계 어디서나 시작이 어렵기 마련이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할 일 없는 흑인들과 멕시칸들이 매표소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매표개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동네 구경을 한다며 한 바퀴 돌았다. 빈집, 부서진 집, 붉은 페인트로 쓴 욕지거리로 낙서된 집... 흉흉한 동네였다. 극장 앞으로 오니 제법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영화는 시작부터 관중을 압도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객석의 긴장은 더 해 갔다. 잠시 주위를 돌아봤다. 좌석 뒤 입석까지 꽉 들어차 있었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영화는 거세게 몰아쳤다. 마침내 모든 이야기는 끝났다. 그리고 감독은 관객에게 물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스탭 캐스트의 자막이 오르자 관객들은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흥분한 얼굴로 서로 마주 보며 엄지를 들어올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 있었다. ‘바로 저거다. 저런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내 마음은 뜨겁게 타고 있었다.

극장 문을 열고 나온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극장 매표소 앞에 선 사람들의 줄이 동네전역을 감고 있는 것이었다. LA 고급승용차들이 주차장을 꽉 메우고, 대로에는 진입하는 차가 서로 뒤엉켜 큰 사고가 난 것처럼 보였다. 흑인들이 암표를 사라며 외쳐댔다. ‘10달러요’ 하던 소리가 순식간에 ‘25달러요’로 변하였다. 4달러50센트 티켓이 무려 5배 이상 뛰고 있는 것이었다. 감독으로서 영화에 빠져있던 내가 순간 장사꾼 머리로 돌아갔다. 급히 극장 앞에 붙은 포스터 쪽으로 달려갔다. 배급사 이름을 보았다. .

종종걸음으로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가 교환에게 전화번호를 안 다음 다이얼을 돌렸다. 뉴욕이었다.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외국영업부 직원을 찾았다. 연말이라 사람들이 늦은 시각까지 일하고 있었다. 곧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플래툰, 한국판권 살 수 있습니까?” 그가 곧 대답했다.

“네. 물론이죠.” 됐다, 싶었다. 다시 얼마냐고 물었다. “35만달러”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무명감독, 무명배우 그리고 미국전역배급도 못하는 영화 금액치고 너무 높은 가격이었다. 잠시 내가 머뭇거리는 동안 “헬로우, 헬로우...”소리가 상대편에서 들려왔다. “네. 좋습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리고 약속시간을 요청했다. 19일 오후 5시, 뉴욕 ORION사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공중전화박스를 나오는 순간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50달러요’라는 암표장사의 외침이었다. 이제 암표가 10배 이상이 되었다. 그리고 인산인해. 나는 하늘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영화사직원과 미팅 약속한 것으로 순식간에 내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보았다.

십 달러짜리 몇 장과 동전 몇 개가 잡혔다. 시간을 보니 약속시간이 20여 시간 남았을 뿐이었다. ‘도리가 없다. 신세 한번 더 지자.’ 하며 유럽도주 시절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를 빌려줬던 친구 박성은에게 다이얼을 돌렸다. 친구는 선뜻 나에게 계약금 7만달러의 수표와 뉴욕 왕복여비를 빌려주었다.

여행사로 다이얼을 돌렸다. 연말에다 주말이라서 뉴욕행 비행기는 이미 매진되어 한 좌석도 남아있지 않았다. 공항으로 달렸다. 공항에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한 가지 방법이 나타났다. 시카고로 가서 그곳에서 뉴욕으로 가는 한 좌석이 가능했다. 나는 시카고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시카고로 비행기가 날아가면서 시간이 19일로 바뀌기 시작했다. 깊은 밤, 시카고 공항에서 뉴욕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문득 2년 전 여름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영화 <땡볕> 으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시카고 영화제에 참석하였었다. 이제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 무연무전(無緣無錢)으로 지구를 돌고 있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공항 대기실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3시간이 지나자 뉴욕 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기내에서 혹시나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사가지고 갔으면 어떡하나 하는 조바심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 불안한 생각을 털 수 있었다. “아니야. 나는 운이 좋은 놈이야.” 그 날 나는 뉴욕으로 출발하기 전 남은 자투리 시간 동안 운전면허시험을 한 번에 패스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동차를 렌트하여 핸들을 잡고 LA 프리웨이를 달려 공항으로 갔던 것이다. 12월 19일 오후 5시. 뉴욕 맨해튼 33가, ORION사 문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