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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38> 가수 송대관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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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38> 가수 송대관의 전성시대

입력
2008.12.17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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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세계의 수도라고 부른다. 그야말로 최고와 최저가 다 모인 곳이다. 동양인, 백인, 흑인, 히스패닉 등등. 인종과 출신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곳이다. 80년인가, 81년인가 어느 날 나는 뉴욕 중에서도 가장 붐비는 맨해튼 한복판에서 낯이 익은 한국인 젊은이를 만나게 된다. 송대관이다. 그리고 그 옆에 태진아도 있었다.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공연이 있어서 왔나?" 내가 물었다. "아닙니다. 여기서 살아 보려고 왔습니다." "?"

살아 보려고 왔다니? 이민을 왔다는 말인가? 그토록 고생을 하다가 이제 겨우 빛을 보기 시작하는데 이민을 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무슨 소리요. 잘 나가는 가수가 우리나라 무대에서 활동을 해야지, 그 동안 고생한 것이 아깝지도 않은가요."라고 물으니 "큰 동네에 왔으니까 인생 공부 좀 해보고 언젠가는 돌아 가야죠."라고 그들은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만 8년 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1988년에 송대관이 귀국을 했다. 귀국한지 20년 동안 저돌적인 가수 활동을 하더니 지난 8월에는 제2대 대한가수협회장이 되었다.

그는 아마도 요즘 가장 바쁜 가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밥 먹을 시간도 없다."는 게 본인의 말이다. 실제로 점심 굶는 적이 많이 있다고 했다. 이른바 '전성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그는 12월 23일부터 이틀간 '송대관 40년 기념 디너 쇼'를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가수가 돼 첫 번째 노래를 취입한 날로부터 따지면 41년째다. 그가 공식 데뷔한 때는 1967년이고 당시 부른 노래는 '인정 많은 아저씨'다. 그렇다면, 지금 회갑을 넘긴 나이(1946년생임)에 전성시대를 맞아 늦게 꽃을 피우고 있는 송대관이 살아온 삶은 레드카펫처럼 화려하기만 한 것이었을까? 연극으로 치면 그의 인생은 4막으로 나뉠 수 있다.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을 한다. 여기까지는 지방에서 올라온 다른 어떤 가수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돌봐 주는 이 하나 없는 그로서는 어떤 길을 찾아야 가수가 될는지 막연할 뿐이었다. 그래서 용기 내어 찾아 간 곳이 '오아시스 레코드사'였고 이곳에서 손진석 사장을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송대관은 레코드사의 일을 거들어 주며 가수 공부를 하게 된다. 내가 그를 만난 것도 이때였다.

송대관은 성실하기도 했지만 낙천적인 성격에다가 구수한 전라북도 사투리로 주변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 주곤 했다. 그러나 가수로서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처음 취입한 노래에 대한 반응이 신통치 않아 고생을 하게 된다. 지금은 바빠서 점심을 굶지만, 그때는 돈이 없어서 먹고 싶은 음식을 멀리서 보아야만 했을 것이다. 가수의 꿈을 여러 번 접을 생각까지 했을 것이다. 이때가 그에게는 가슴 아픈 제1막이다.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자!"라고 결심하고 스스로 작사를 해서 "해뜰 날"이라는 노래를 취입한다. 1976년이다.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온단다"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본인 자신도 놀랄 정도로 큰 반응이 일었고, 그 해에 방송국 가요대상 3개를 휩쓸었다. 그야말로 해가 뜬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가요시장이 크지 못해서 이름은 알려졌지만 경제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자연히 회의가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행을 결심하게 된 모양이다. 고민하던 끝에 1980년에 그는 뉴욕으로 간다.

하지만 낯 선 곳에서의 고생은 또 다른 가슴앓이를 하게할 수밖에 없다. 문화의 차이, 언어문제, 게다가 꿈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화려한 무대의 모습 등등으로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사람이 이국 땅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까지가 송대관 인생 제2막이 된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어릴 때 정읍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의 각오로 열심히 가수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후배들이 자리 잡고 있는 가요판 이었지만, "어딘가는 내가 들어 갈 자리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리 저리 뛰었습니다."라고 그는 그 때를 회상했다. 노력만 한다고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운도 많이 따라 주었고, 상복도 많았다. 특히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은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 한다. 그는 지금 제3막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가수들의 대표가 된 송대관은 포부가 크다. 그는"모든 가수들이 하나로 뭉치도록 하겠으며, 원로 가수들의 노후 대책을 강구하고, 60이나 7080 세대 때의 가수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방송들이 가요 프로그램을 활성화 할 수 있도록 촉구 하겠다"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열변을 토하고 있다.

'네 박자' '사랑해서 미안해' '유행가' '오래오래' 등등 많은 노래를 불렀지만 그는 역시 자신을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만든 '해뜰 날'을 두고두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가수, 연주자, 국악인, 클래식 음악가들의 저작권을 비롯한 모든 권익을 맡고 있는 사단법인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회장 송순기)가 있다. 그 협회의 사무실을 염창동으로 이전하면서 가진 기념식 자리에서 건배제의를 송대관이 하게 됐다. 그때 그는 "제가 '쨍하고' 라고 선창을 하면 여러분들께서는 '해뜰 날'이라고 외쳐 주십시오"라고 말해서 좌중을 웃겼다.

송대관의 말에 따르면 전북 정읍시는 고향의 자랑이라며 그의 노래비를 세우고 '송대관 가요제'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여의도에 있는 가수협회 사무실에는 하루에 한번씩 꼭 들린다면서, "원로 선배 가수님들이 쉬면서 바둑,장기도 둘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며 밝은 표정이다. 그의 인생 제4막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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