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대 영문과 졸업, 제약회사 수출담당직 9년8개월, 미국 영어연수 3개월, MS오피스 소프트웨어 상급, 영어회화 상급. 윤모(44)씨의 이력서 주요 내용이다. 언뜻 보면 경력직 이직을 위한 이력서 같지만 그는 기업 대표나 임원의 수행 운전기사를 지원하고 있다.
윤씨는 10년 전 외환위기 당시 다니던 제약회사에서 구조조정의 아픔을 겪었다. 이후 외국인회사, 영어학원 등을 전전하다 올해 8월 대기업에 파견직 자리를 얻었지만 지난달 또 "회사가 어려우니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열 세 살, 한 살 두 딸을 둔 그는 "이제 나이 때문에 이력서를 낼 곳도 없어, 그나마 편해 보이는 수행 기사직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불황의 늪이 깊어지면서 수행 기사를 지원하는 화이트 칼라들이 늘고 있다. 같은 운전이라도 버스나 택시, 택배 등보다 일이 깔끔하고, 한 달 최소 180만원에서 많게는 250만원까지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하다 망한 사장님도 있고, 로스쿨 준비하는 대학생도 있다. 험한 일에 뛰어들 엄두는 나지 않고, 생계는 급한 사람들이다.
유명 보험사 설계사인 이모(29)씨는 최근 경제위기로 300만원이던 수입이 100만원으로 줄었다. 설상가상으로 2년 전 결혼자금으로 펀드와 주식에 투자한 3,500만원 중 1,500만원을 날렸다.
결혼식은 5개월 남짓밖에 남지 않았는데 모아둔 돈도 잃고 수입까지 줄자, 이씨는 수행 기사 일을 해보기로 했다. 파트너만 잘 만나면 오래 일할 수 있고, 급여도 높아 대리운전보다 낫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말마다 모델하우스에서 분양상담도 하고 있어 수행 기사까지 하면 쓰리잡을 하게 되는 셈이다.
수행 기사는 상대적으로 경기를 덜 타는 고위층을 상대하는 일이라 꾸준히 일자리가 있지만, 불황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근 수행 기자 일자리는 지난해에 비해 3분의 1 가량 줄어든 반면, 지원자는 40% 가량 늘었다.
수행기사 모집업체 A사의 박미선 실장은 "예년에는 더 좋은 일자리를 찾는 경력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올해는 회사원이나 자영업자 출신의 초보 기사들이 많다"고 전했다.
수요가 30대~40대 초반에 한정돼 있어, 절박한 심정으로 업체를 찾았다가 발길을 돌리는 이들도 적지 않단다. 조건이 맞아 구직 등록을 받아줘도 수 개월에서 1년 넘게 '대기' 상태인 경우도 허다하다.
김모(40)씨는 지난 8월 7년간 운영하던 치킨전문점을 정리하고 수행 기사 구직에 나섰지만 아직 자리를 얻지 못했다. 낮에는 대리운전, 밤에는 주유소 일을 해 한 달에 120만원 남짓 벌고 있지만, 생활비 대기도 벅차 가게 낼 때 얻은 시 융자금을 갚지 못해 지난달 집이 가압류 됐다. 그는 "수행기사라도 되서 좀 더 벌면 지금 위기는 벗어날 수 있을 텐데…"라며 한숨을 지었다.
수행 기사 일은 겉보기와 달리 그리 녹록치 않다. 박 실장은 "다른 운전직보다 몸은 좀 편할 수 있지만 사용자 직속이라 해고 당하기 쉽고 스트레스가 매우 심해 원형탈모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면서 "자신의 적성 등을 고려해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혜경 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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