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영국 런던의 한 성인 클럽. 검은 코트 차림의 남자 2명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클럽 주인 보글이 낮게 속삭인다. "제기랄…." 경찰관인 두 남자는 보글의 동업자인 소냐가 화대를 올린 것을 들먹이며 말한다. "파도가 높으면 배도 높아지잖아." 상납금을 더 내놓으라는 요구다.
두툼한 돈다발을 받은 두 남자가 돌아가자 보글은 책상 서랍에서 작은 노트를 꺼낸다. 거기엔 지금까지 경찰관들에게 준 뇌물 액수와 날짜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보글은 이 '뇌물 리스트'를 은행 안전금고에 보관한다. 소동은 은행 안전금고가 털리면서 시작된다.
▦부패한 경찰관들은 은행털이범 사건 수사 담당 경찰관들보다 한 발 앞서 강도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다. 잘못하면 감옥에 가게 될 판이니, 수사 관할이고 뭐고 따질 겨를이 없다. 보글도 가세한다. 지금까지 뇌물을 준 경찰관들의 보호막 속에서 잘 지내왔는데 자칫하다간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다. 뇌물 리스트는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돈을 먹은 경찰관들을 협박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해줄 보험증서나 마찬가진데 없어지다니…. 보글은 은행털이범들을 찾아내 뇌물 리스트를 손에 넣기 직전 체포된다.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뱅크 잡> 내용이다. 뱅크>
▦검은 돈의 실체를 고스란히 담은 뇌물 리스트를 작성하는 데는 동서양이 따로 없다. 우리에게도 뇌물 리스트는 참 익숙한 존재다. 정치인이나 권력을 쥔 인사들이 등장하는 대형 비리 사건이나 무슨무슨 게이트 때마다 뇌물을 준 의혹이 있는 기업이나 사람 이름을 딴 '○○○ 리스트'가 회자됐다. '김상진 리스트''삼성 떡값 리스트''제이유 리스트''김우중 리스트' '진승현 리스트''조동만 리스트'등이 등장했지만 실체가 확인되지는 않았다. 전 해양수산부 장관의 사법처리로 이어진 '신성해운 리스트'처럼 수사 성과를 낸 리스트는 극히 드물다.
▦'박연차 리스트'와 '정대근 리스트'의 존재 여부가 세종증권 매각 관련 비리 수사의 핵으로 떠올랐다. 두 사람 이름을 딴 리스트의 등장은 박씨와 정씨가 모두 정ㆍ관계 인사들과 두터운 교분을 유지해왔다는 점, 비자금과 뇌물로 조성한 돈이 각각 1,100억원, 100억원에 이른다는 점, 사업을 확장하거나 정계 진출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힘있는 자들의 보호나 지원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점 등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결과다. 과연 두 사람은 보글처럼 보험성 리스트를 작성했을까. 작성했다면 검찰에서 밝힐까, 아니면 가슴에 묻어 버릴까. 검찰의 2라운드 수사결과가 궁금해진다.
황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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