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요코하마에 사는 선배를 만나러 갔다가 개항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조성해 놓은 한 공원에 들렀다. 주택 외양이나 조성된 정원의 생김새가 유럽을 연상시켜서 일본의 여느 거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공원을 따라 천천히 산책을 하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작은 간판이 눈에 띄었다. 고양이 박물관이라는 간판이었다. 고양이도 좋아하고 박물관도 좋아하는 터이니 산책 끝에 들러보기로 했다.
박물관을 찾는 일은 수월했다. 이정표가 워낙에 여기저기 붙어 있던 탓이었다.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해 놓은 것으로 보아 관람객이 많은가 싶었으나 박물관 입구가 보이는 골목길은 한산하기만 했다. 드나드는 관람객이 보이지 않아 휴관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박물관 문은 닫혀 있었다. 돌아서 가려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늦어서 미안하다며 문을 열어 주었다. 입관료를 내고 들어가 보니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박물관이었다. 1층은 박물관으로, 2층은 가정집으로 사용하는 듯 했는데 아마도 할아버지는 2층에 계시다가 문을 열어주러 내려오신 것 같았다.
박물관의 규모나 전시 방식은 대형 박물관이나 설비가 좋고 관리가 철저한 박물관에 비하면 옹색하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전시품의 규모와 유리로 차단된 전시 방식에 압도당하는 대형 박물관과 달리 동네 할아버지의 옛날 물건들을 하나씩 구경하는 듯한 재미가 있었다. 고가의 물건들은 아니었지만 오래되고 손때가 묻은 물건이었다. 고양이와 관련된 다양한 물건들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게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문이 닫히지 않게 받쳐두는 걸쇠에는 꼬리를 길게 내린 고양이 인형이 교태를 부리듯 앉아 있었고, 아무렇게나 꽂아둔 편지 봉투에는 고양이가 그려진 우표가 붙어 있었다. 숨은 그림을 찾듯 뜻밖의 장소에서 고양이 관련 물건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했다. 일본이야 워낙에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고 고양이 인형도 어디를 가나 흔한 편이지만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수십 종의 인형들도 생김새가 전부 달라 수집에 기울인 할아버지의 공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볕이 드는 자리에 앉아 천천히 보고 가라며 유일한 관람객인 우리를 거들었다. 선배가 물으니 짐작대로 평생에 걸쳐 모은 물건들이라고 했다. 단지 고양이가 좋아서 모으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누군가 여행길에 사다 주기도 하고 오로지 물건을 사러 여행을 다니면서 불어났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고양이 박물관은 할아버지 일생의 전시장이자 재미난 놀이터이고 소규모의 부업장인 셈이었다.
나는 워낙에 한 가지에 집중하고 몰두하는 성격이 못되는 탓에 마니아나 수집가를 보면 순수한 몰입의 세계를 가졌다는 것이 부러울 때가 있다. 흔히 마니아 문화에 대해 얘기할 때 한 가지에 몰두하여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폐쇄성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개개인이 자기만의 세계를 깊고도 넓게 만들어가는 일이 결국은 한 사회의 문화적 스펙트럼을 넓히고 다양성을 구축하는 일이 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한 나라의 문화란 개개인의 문화적 역량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볕이 잘 드는 카페 같이 편안하던 소규모 고양이 박물관을 다녀오면서 사회의 문화를 다양하게 하는 일은 그렇게 거창하고 어려운 작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문화적 영토를 가진 개인이 많은 사회, 그런 개인의 몰입을 존중해 주는 사회의 문화는 다양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편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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