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사회의 정치ㆍ사회적 담론 공간에서 '인권'이라는 용어는 일상어처럼 쓰인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동양 사회에 인권 개념이 착근한 역사는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누구나 누릴 권리'란 뜻의 인권(人權)이라는 단어도 일본 메이지(明治)시대 사상가들이 서구의 근대 사상을 수입하면서 만든 신조어다.
그렇다면 아득히 오랜 동양의 사상사에 인간의 보편권리라는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일까? 10일은 세계 인권선언 선포 60주년이 되는 날.
그에 즈음해 아시아 인권 개념의 뿌리를 탐색하는 '유교와 인권' 학술토론회가 12일 국가인권위원회 제4차 인권교육포럼에서 진행된다. 발제문과 토론문을 통해 논쟁의 맥을 들여다본다.
■ "덕(德) 윤리는 오늘날 더 큰 시사"
발제자인 이승환 고려대 교수(철학)는 유교 사상의 도덕 규범에서 인권 개념의 단초를 찾는다. 그는 "춘추시대 공자, 맹자로부터 시작해 청 말의 담사동, 강유위에 이르기까지 동양 정치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인자한 정치(仁政)'란 생존을 위한 필수여건을 국가가 보장해 주는 정치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세계인권선언문의 '생존권'이나 '사회적 권리' 같은 단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인정'이 이런 권리를 실질적으로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예기(禮記)> '예운(禮運)' 편을 근거로 든다. "대도(大道)가 행해지던 시대에는 천하를 개인의 사유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으로 하여금 안락하게 수명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주고, 장년의 사람들은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으며, 어린이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게 해주고,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 장애인에게도 생존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복지를 마련해주었다." 예기(禮記)>
권리보다 도덕적 규범에 방점을 둔 유교적 관점은 현대에 더 큰 시사점을 준다는 것이 이 교수의 시각이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해서는 가진 자들의 소유권(세계인권선언 제17조에 규정)을 제약할 수밖에 없는데, 심화된 자본주의 환경에서 권리와 권리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진 자에게 절제를 강조하면서 못 가진 자의 생존권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는 덕(德) 윤리가 중요하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 그는 권리 중심의 세계인권선언을 보완하기 위해, 약자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책임을 명시하는 세계책임선언(UDSRㆍUniversal Declaration of State Responsibility)을 제안한다.
■ "불평등 용인은 인권 개념과 거리"
토론자로 나선 조경란 성균관대 연구교수도 근대 이전 아시아 인권에 관한 담론이 서구 중심주의를 탈피하려는 노력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시아에 잔존한 봉건적 지배질서,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가능성을 경계한다.
"경제권, 사회권, 문화권적 차원의 인권 주장이 약자의 인권 향상과 연결되지 않고, 일부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 연결된다면 그 의미는 퇴색될 것"이라는 게 조 교수의 지적이다.
'유가적 인권 담론'에 대한 조 교수의 본격적 비판은 정치적 권력관계에서 벗어난 인권 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인권은 사회적 역학관계, 정치적 권력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며 "인간의 도덕에서 인권의 뿌리를 찾는 담론은 관념적이고 자족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정명론(正名論ㆍ'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는 차원의 운명론)에 근거한 역할 권리 개념은 불평등을 전제한 것으로, 계급적 보편성이 핵심인 인권의 기본 가치와 어긋난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또 "불평등을 '동양의 특수성'으로 덮어둔 채 지배층의 도덕적 규범의식에서 인권의 뿌리를 찾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주관적"이라고 지적한다. 유가적 상층계급의 도덕적 세계관에 근거한 주지주의적, 계몽주의적 '시혜'에서 인권의 뿌리를 도출할 수는 없다는 관점이다.
그는 휴머니즘, 동정적 차원에서의 소극적 인권 담론의 위험성을 오늘날의 현실에서 찾는다. "천부인권에 대한 도덕적 이해가 삶의 양식으로 자리잡은 서구사회에서도 불법체류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등 인권 침해가 끊이지 않는다"며 "아시아 사회에서는 더욱 정책적 차원에서 인권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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