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인 1월 4일. 4년제 대학 총장들의 모임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정기총회에 이명박 대통령이 모습을 나타냈다. 대통령이 대교협 총회에 참석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라 행사장은 후끈 달아올랐다. 대학 총장들은 "앞으로 대교협의 목소리가 커질 것"이라며 고무됐다. 이 즈음해서 대입업무가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대교협으로 넘어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11개월이 지난 지금, 대학들을 보면 물 만난 고기 같다. 시어머니 노릇을 하던 정부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번 2학기 수시모집에서 대학들의 그런 행태가 유감없이 드러났다.
자연계 논술에 '최대값을 구하라' '벡터값을 구하라' 등 정답이 정해져 있는 본고사형 문제를 출제한 대학이 여럿이었다. 수험생들은 "논술시험인지, 수학시험인지 모를 정도였다"며 황당해 했다. 정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는 문제는 본고사로 간주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대학들이 잘 알고 있지만 소 귀에 경읽기였다.
고려대는 수시 일반전형에서 특목고 학생들을 우대하는 고교등급제를 버젓이 적용해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항의가 봇물처럼 쏟아졌는데도 사과 한마디 없었다.
이렇게 한 발짝, 두 발짝 가이드라인에서 벗어나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자 대교협 사무총장이란 사람은 노골적으로 본심을 드러냈다. "(대학입시의) 3불 가운데 고교등급제와 본고사는 대학 자율에 맡겨도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라는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마치 3불 정책을 폐지하는데 이미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대교협이 뒤늦게 "아무런 결정을 한 사실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대교협의 속뜻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3불 허물기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명문대 총장들이란 점이 더욱 실망스럽고 허탈하다. 고려대 총장은 고교등급제 적용 의혹이 일자 "대학이 우수한 학생을 뽑겠다고 하는데, 큰 문제가 되는 양 보도한 일부 언론에 문제가 있다"고 엉뚱하게 언론에 화살을 돌렸다.
김한중 연세대 총장은 8월 본보와 인터뷰에서 "고교등급제와 본고사 금지 조처가 없어지지 않는 한 '입시 자율화'는 수사적인 표현에 불과하다"고 말했고, 이장무 서울대 총장도 지난해 "3불 정책을 포함한 대입 자율권 문제를 대학ㆍ정부ㆍ사회가 좀 더 개방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뽑아 손쉽게 가르치려는 주요 대학들의 이기주의와 편의주의는 수십 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일류대의 본질이 최고의 교육서비스로 학생들이 가진 잠재능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것이라면 이들은 자격 미달이다.
미국의 우수한 대학들은 단순히 학업 성적보다는 가능성을 포함한 광범위하고 다양한 선정기준을 활용한다. 몇 년 전 유명 사립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한국계 학생이 SAT에서 만점을 받고, 수학ㆍ과학경시대회에서 우승하고도 하버드대에서 떨어진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 하버드대는 "여러 면에서 탁월하지만 학교에 다니는 동안 봉사한 적이 거의 없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봉사할 줄 모르는 학생은 하버드대학의 명예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탈락 이유를 밝혔다.
명문대, 일류대라면 이름에 걸맞게 사명감과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대학들이 빨리 사고를 쳐서 입시업무가 정부에 환원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여론이 시중에 나돌고 있는 이유가 뭔지를 대학들은 곰곰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이충재 부국장 겸 사회부장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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