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의 거두 퇴계 이황(1501~1570)은 매화를 유달리 사랑해 100편이 넘는 매화시를 지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다 표현하지 못했다고 여겼는지, 퇴계가 숨을 거두며 남긴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저 매화 나무에 물을 좀 주거라."
과유불급이라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규율이 무연해지는 대목이 그들의 매화 사랑이다. 그 유별난 사랑이 어땠는지 보여주는 이종묵 서울대 교수(국문학)의 논문 '눈 속의 매화를 즐기는 법'이 계간 '문헌과 해석' 겨울호에 실린다.
선비들이 매화 가운데 최고로 친 것은 눈 속에 핀 매화 설중매(雪中梅). 그러나 봄철이 개화기인 매화를 눈 속에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교수는 논문에서 설중매를 보기 위해 선비들이 벌인 천태만상을 소개했다.
우선 더운물 주기. 박장원(1612~1671)은 <구당집> 에 자신이 매화를 키운 법을 이렇게 적었다. "매화 한 그루를 얻어 마당에 심었는데 말들이 뜯어먹고 아이들이 잎을 꺾었다. 이를 불쌍히 여겨 가지 서너 개를 빼내 침실에 두었다. 구당집>
그 해 세모에 하인을 시켜 끓인 물을 하루에 한두 차례 며칠 부어주었다. 가지에 눈이 생기더니 점차 커졌고 꽃망울이 맺혔다."
접붙이기 방법도 동원됐다. 강희안(1417~1464)의 <양화소록> 에는 복숭아나무에 매화의 접을 붙이는 방법이 소개돼 있다. "두 나무가 서로 닿는 부분을 깎아 붙인 다음 살아있는 칡덩굴의 껍질을 벗겨 단단히 잡아 낸다. 양화소록>
꽃봉오리가 맺히면 따뜻한 방안으로 들여놓는다. 자주 미지근한 물을 뿜어주고 옆에 뜨거운 화로를 놓아두어 찬 공기를 쐬지 않게 한다."
18세기부터는 요즘의 비닐하우스 개념인 감실(龕室)도 등장한다. 정극순(1700~1753))은 <이소매기> 에 자랑스럽게 이런 글을 남겼다. "날이 차기 전에 깊숙한 방에 넣어둔다. 왕성한 기운이 흩어져 꽃을 피우지 못할까 우려되면 작은 합(閤)을 만들어 담아 둔다. 이소매기>
먼지와 그을음이 절대 바깥을 오염시키지 않게 하여 맑은 싹이 안에서 자라날 수 있게 한다. 이 때문에 천지가 한창 추울 때 꽃을 피운다. 마치 신선이나 마술사가 요술을 부린 것 같다. 아아, 신기하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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