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보다'의 '엿-'은 일부 동사 앞에 덧붙어 '몰래', '가만히' 따위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사다. 생산성이 그리 높지 않아서, '엿보다' 외에 '엿듣다' '엿살피다' 따위의 동사 정도에나 나타날 뿐이다. 몰래 본다는 뜻이므로, '엿보다'는 '넌지시', '슬쩍', '슬며시', '슬그머니' '가만히'처럼 은밀함이나 정태성(靜態性)을 드러내는 부사들과 궁합이 맞는다.
'엿보다'에는 '알맞은 때를 기다리다'라는 뜻도 있다. '기회를 엿보다' '상황을 엿보다' 같은 표현에 그런 뜻의 '엿보다'가 보인다. 이 '엿보다'는 '살피다'로 대체할 수 있다. 이 때 '엿보다'에는 부정적 함축이 거의 없다.
'슬며시 본다'라는 본디뜻으로 쓰일 때도 그 뉘앙스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비유적으로 쓰일 때 특히 그렇다. 이를테면 "유리창을 통해 방안을 엿보는 보름달" 같은 표현에서 '엿보는'을 '들여다보는'으로 바꾼다고 해서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엿보다'가 곧이곧대로 쓰일 때, 거기 함축된 은밀함은 흔히 부정적 뉘앙스를 낳는다. 옛 전체주의 사회에는 시민들의 행동거지와 말마디 하나하나를 엿보고 엿들으려는 비밀경찰관들이 수두룩했다. 그 엿보기의 목적은 체제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을 솎아내 사회에서 격리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 사회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특히 냉전시기에는, 소위 '자유진영'과 '평화진영'이 상대방의 내부를 엿보려는 활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옛 소련의 KGB나 미국의 CIA, 이스라엘의 모사드, 영국의 M16(코드넘버가 007인 제임스 본드가 소속된 기관) 등에서 일하는 '살인 면허 소지자들'은 단순히 엿보는 데서 더 나아가, 공공건물을 파괴하고 사람을 납치하거나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를 애국심이나 자유나 평화의 이름으로 저질렀다.(사실은 돈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군부독재 시절, 비밀경찰관이나 그 끄나풀들은 '불순분자'를 찾아내기 위해 교정(校庭)이나 노동현장을 엿보았다. (설마 요즘도 그런 건 아니겠지!) 그들과 인연을 잘못 맺으면, 어느 날 낯선 건물로 끌려가 욕조에 머리가 처박히거나 온몸이 고압전류에 망가지기 일쑤였다.
언제 어디서나 감시당하는 현대인
민주주의가 피어나고 있는 요즘엔 엿보기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다만, 전통적으로 국가권력의 몫이었던 엿보기의 상상부분이 민간으로(특히 재벌기업으로) 이전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삼성은 유난히 도청과 인연이 깊은 기업집단이다.
때로는 주체로, 때로는 객체로. 국가와 대기업은 우리를 24시간 엿보고 있다.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그렸던 그 음험한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아니 이미 펼쳐졌다.
엿보기는 시민의 안전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된다. 그 안전의 대가로 우리는 늘 감시당한다. 엿보기 시스템이나 기구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 본디 목적이 엿보기가 아니었지만, 기술의 공진화(共進化)를 통해 이내 그런 기능을 겸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우리들에게 안전과 편의를 베풀면서, 우리들의 사생활을 엿본다.
가장 사적인 생활인 연애까지도. 단 둘이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입을 맞추려던 연인들은 천장 한구석에 달린 CCTV를 의식하고 자신들만의 낭만적 행위를 포기하기 일쑤일 것이다. 요즘 출시되는 휴대폰은 거의 다 카메라 기능을 겸하고 있다. 휴대폰 보급률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에선 만인이 만인을 엿본다.
사람에겐 무언가를 엿보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런 심리 가운데 성(性)과 관련돼 거세게 발현되는 증세를 관음증(觀淫症)이라 부른다. 관음증은 글자 그대로 '음란한 것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증세'다. 관음증은 프랑스어 '부아이외리슴'(voyeurisme)의 번역어다.
'보다'라는 뜻의 동사 '부아르'(voir)의 어근에 동작주를 뜻하는 접미사 -eur을 붙여 voyeur를 만든 뒤, 이런저런 행태나 주의(主義)를 뜻하는 접미사 -isme을 다시 덧붙여 만든 말이다. 이미 'voyeur'만 해도 그저 '보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관음증 환자, 곧 남들의 은밀한 행동을 은밀히 엿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변태성욕자라는 뜻을 지녔다.
같은 동사 voir에 동작주를 나타내는 또 다른 접미사 -ant을 붙여 만든 부아양(voyant)이 매우 긍정적인 뜻, 곧 '안광이 지배를 철하는' 혜안의 견자(見者)를 뜻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관음증 환자는 남들이 옷을 벗는다거나 섹스를 한다거나 배변을 하는 모습을 엿보며 쾌감을 느낀다. 탈의실, 모텔방, 화장실처럼 가장 사적인 공간에도 엿보는 눈이 있을 수 있다.
엿보는 심리 性的 발현땐 관음증
집안사람들이 신방(新房)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놓고 신부 신랑의 첫날밤을 훔쳐보는 장면이 사극에 더러 비친다. 전근대 한국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다반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을 전형적인 관음증의 발현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엿보이는 사람도 엿보는 사람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 엿보기 관행에는 성애의 뉘앙스가 옅다. 그것은 가벼운 장난이며 놀이였던 것 같다. 그러나 단옷날 창포물에 몸을 씻는 아낙들을 동자중 두 놈이 엿보는 풍경(바로 신윤복의 <단오풍정> [端午風情]!)에는 엷게나마 관음증이 배어 있다. 단오풍정>
관음증 환자들은 타인의 성행위나 알몸을 엿보는 것으로 섹스를 완성한다.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성(또는 동성)의 벗은 몸이나 성교 장면을 보면 성욕이 불끈 인다. 그러나 이들은 관음증 환자가 아니다.
관음증 환자는 스스로 섹스를 하는 것보다 남들의 섹스를 엿보는 데서 더 큰 성적 만족을 얻는다. 그들에게는 파라섹스(para-sex), 곧 곁다리섹스가 가장 만족스러운 섹스다.
엿보는 대상이 꼭 실제 성행위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상은 무대 위 연행일 수도 있고, 브라운관이나 컴퓨터 모니터나 영화 스크린일 수도 있다. 엿보는 사람은 흔히 제 몸을 어둠 속에 숨긴다.
다시 말해 제 존재를 드러내기 싫어한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조명이 꺼지는 것은 스크린의 영상을 또렷하게 하기 위해서겠지만, 그 소등은 엿보는 사람들, 곧 관객들에게 어둠의 안온함을 베푼다.
나체나 섹스를 엿보며 쾌락을 느끼는 증상, 즉 관음증은 문학예술사의 변두리에서 제 나름대로 뿌리를 내려왔다. 이 분야의 비조(鼻祖)라 할 사드 후작은 그냥 넘어가자. 프랑스의 신소설 작가 알랭 로브그리예는 서른 세 살 때인 1955년에 <관음증환자> (Le Voyeur)라는 소설을 내 비평가상을 받았다. 관음증환자>
줄거리는 마티아라는 시계 외판원이 어린 시절 살았던 섬을 방문해 자전거를 타고 섬을 둘러보는 과정이다. 바로 그 날, 평판이 그리 좋지 않은 소녀가 살해된다. 소설은 범인이 누군지를 끝내 밝히지 않은 채 마티아의 시선을 좇으며 이 사건의 앞뒤를 샅샅이 톺아본다.
이 소설에 수여된 비평가상은 파리 문단에 큰 소란을 빚었다. 롤랑 바르트는 이 소설을 '시선의 문학'(litterature du regard)이라 명명하며 극찬했다. 모리스 블랑쇼도 거들었다. 그러나 문단 주류의 평가는 아주 야박했다.
소설가 겸 비평가 에밀 앙리오(생존 기간이 거의 겹치는 동명의 화학자와 혼동해선 안 된다)는 <르 몽드> 의 서평난에서 로브그리예를 정신병자로 취급하고 교화소로 보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비록 뒷날 그 판단을 철회하긴 했지만. 르>
엿보기를 주제로 삼은 예술작품들이 논란을 일으키는 것은 그것들이 흔히 강력범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인 감독 마이클 파월이 1960년에 만든 심리스릴러 영화 <관음증환자> (Peeping Tom)는 관음증을 연쇄살인, 아동성학대와 버무림으로써 영화계 안팎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관음증환자>
언감생심 수줍은 짝사랑일 수도
'엿보기'가 사랑의 말이라면 그 사랑은 불구의 사랑일 것이다. 그 사랑은 제 눈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간수(看守)의 사랑이자, 딴 사람의 눈에 걸려든 수감자의 사랑이다.
사르트르가 제 희곡 한 인물의 입을 빌려 "지옥이란 타인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 전형적인 타인이 바로 '부아이외르', 엿보는 사람일 테다. 현대의 성(性)산업은 엿보기를 버젓한 섹스 장르로 만들었다. 한량들은 구멍을 통해, 유리벽을 통해, 객석에 앉아서 타인의 벗은 육체를, 타인들의 섹스를 한갓지게 엿본다.
그러나 엿보기는 곱다란 사랑의 시작이기도 하다. 나무꾼과 선녀의 사랑은 지상의 샘에서 멱을 감는 선녀를 나무꾼이 엿봄으로써 시작됐다. 엿보는 사람은 음란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수줍은 사람일 수도 있다.
순애(純愛)는 본디 수줍음에서 발원한다. 연모하는 마음은 붉디붉은데 제 처지에 비춰 언감생심일 때, 사람은 상대를 맞보지 못하고 엿본다. 그 엿보기의 사랑은 흔히 짝사랑이다. 사촌누이 록산을 향한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엿봄의 사랑이다.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고 넘보지도 못하는 사랑, 그 비스듬한 사랑이 엿봄의 사랑이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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