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말씀을 드리면 또 옛날을 그리는 '낡은 이야기'로 전해질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이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전에는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식들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하는 말씀을 늘 하셨습니다. 물론 그 때 그 '훌륭한'에 담긴 것이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매우 좋은'이라든지 '칭찬할 만하다'든지 '퍽 아름답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높은 관직에 오르라든지 돈을 많이 벌라든지 하는 의미를 담고 그렇게 이야기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때는 그 말뜻이 상당히 폭이 넓고 둥글어서 이른바 '전인적(全人的)'인 함축을 지닌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달리 말한다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하는 규범을 전제하거나 그러한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자식이 어떤 구체적인 직(職)을 가지고 살더라도 살아야 한다는 희구를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하는 말 속에 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전 부모의 모습이 이제는 무척 낯설게 되었습니다. 지금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기대하는 발언과 비교해 보면 그렇습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지금 우리들은 자식들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아예 '훌륭한'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은 언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대신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직(職)을 지칭하면서 "너는 이러저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대통령이 되라든지, 연예인이 되라든지,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라든지, 인기 있는 스포츠맨이 되라든지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혹 '훌륭한'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도 그 말은 '사람'을 수식하지 않습니다. 다만 특정한 직종을 수식하면서 그 직종에서 성공한 모습을 기리는 투로 쓰입니다. '훌륭한 정치인'이나 '훌륭한 연예인' 등으로 쓰일 때가 그러합니다.
물론 우리는 '훌륭한 사람'보다 '훌륭한 경제인'이라고 할 경우가 더 분명하게 내 자녀를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경우 이전과 비해 '전인적인 사람'의 자리를 '전문적인 기능인'이 차지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둘을 굳이 나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어쩐지 '전인성' 또는 '사람다운 사람'이 '직'에 밀려 쫓겨나 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이 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말을 좀더 이어본다면, 오늘 우리에게 아쉬운 것은 이를테면 '학자다운 사람'은 있는데 '사람다운 학자'는 찾아보기 힘든다는 사실입니다. '언론인다운 사람'은 있는데 '사람다운 언론인'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우리네 삶의 온갖 곳에서 이런 현상이 철철 넘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훌륭한'사람을 묘사하기 어렵게 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아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모델이 없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연예인의 모델도 있습니다. 본받을 만한 과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本)이 되는 인간상(人間像)을 그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물론 사람이 온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모자라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꽉 차면 저것이 비고, 저것이 두드러지면 이것이 움푹합니다. 두루 살펴 흠 없기란 사람살이에서 거의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공연히 비현실적인 온전한 인간상을 만들어 놓고 이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그러한 태도 자체가 이미 인간성에 대한 배신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훌륭한 사람'을 일컫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을 애써 모색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 '본'으로 삼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일컬을 수 있는 사람을 당장 우리 현실에서나 역사 안에서 찾을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의 인간이 우리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그려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스스로 빚어 서술해야 합니다. 국사학자 정옥자 교수는 그의 <우리 선비> 라는 저서의 표지에다 다음과 같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
'우리 선비. 나의 빈 곳을 채워 줄 정신의 사표. 하늘 아래 두려운 것은 오직 지조와 백성의 소리였던 그들, 새벽에 일어나 손수 이불을 개고 독서와 사색 속에서도 실용기술을 익혔던 그들, 저녁 시간 친히 했던 자녀 교육에서부터 유산 분배에까지 남녀 차별이 없던 그들, 눈길 닿는 곳 무한하지만 일상에선 고정관념 없이 살뜰했던 참 사람의 초상, 내 안에 흐르는 올곧은 마음의 원천.'
이렇게 묘사된 조선 선비가 '사람다운 사람'인 '훌륭한 사람'의 마땅한 모델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기술된 인간상이 지나치게 소박하고 또 그만큼 '계급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저자가 절박하게 모색하는 '나의 빈 곳을 채워줄 정신의 사표'와 그 모색이 도달한 끝에서 고백하는 '내 안에 흐르는 올곧은 마음의 원천'에 대한 겸허하고 행복한 승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아쉬워해야 할 것은 '훌륭한 사람'의 부재가 아닙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의 실종도 아닙니다. '사람'과 '기능'의 도치(倒置)도 아닙니다. 세상이 바뀌면서 달라진 규범의 혼란 때문에 빚어지는 옛날 격률의 부적합성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 자신의 텅 빈 공허, 그 정신적 가난을 실토하는 일이 우선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아프게 아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일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직한 부끄러움 속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허다한 '훌륭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내 겸허의 부재입니다. 내가 겸손해지면 사표(師表) 아닐 어떤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될 때, 그 훌륭함이 내 안에 흐르는 마음의 원천이 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에 이르면 이제 우리는 이전과 오늘의 괴리를 더 겪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하고 말하면서 그대로 이어 "훌륭한 정치인이 되어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어 붙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 훌륭한 정치인이 되어라!"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자식들을 가르치고, 이렇게 말하면서 오늘 우리 사회를 잘 꾸려갔으면 좋겠습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 교수 · 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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