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낯설다. 신문이나 TV, 영화에서 죽음은 너무나도 흔하지만, 그것은 활자나 영상으로 된 관념적인, 상상의 죽음일 뿐이다. 현실적인 리얼리티로서의 죽음을 우리는 자주 접할 수 없다.
한 직장 동료는 상가에 가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상주에게 아무 말 없이 인사만 하고 물러나와 문상객들과 떠든다고 했다. 많은 동료 역시 그렇다고 했다. 상을 당한 이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지만, 사실 죽음을 가까이서 경험해본 일이 거의 없어서 적절한 말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요즘은 병원시스템 때문에 가까운 친척이 죽어도 그의 시신을 보기가 어렵다. 하물며 친척이 아닌 사람의 시신은 더더욱 보기 어렵다. 보통 사람들이 평생 사람의 시신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장례를 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르는 것이 이제 관습이 됐다. 동네에서는 사람의 죽음은 물론이고 그와 관련된 낌새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우리는 죽음을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법원이 처음으로 존엄사를 인정하는 판결을 한 것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식물인간 상태인 어머니의 목숨을 인공장치로 연장하는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하게 해달라는 자녀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반대론은 존엄사가 인정되면 생명경시 풍조가 고조될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고, 찬성론은 자연적인 죽음을 맞는 길을 열어둔 것으로 평가한다. 며칠 후면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떼야 하는데, 첫 사례이기 때문에 병원 측은 사회적, 윤리적 파장을 염려하고 있다.
존엄사 인정이 혹시 생명권 침해로 이어질지 경계해야겠지만 이번 판결은 요즘 관심이 높아진 '품위 있는 죽음'을 향한 큰 진전이며, 죽음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를 점검해 볼 좋은 기회이다.
최근 수년간 죽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구한 외국 책들이 번역돼 속속 출판되고, 종교단체들이 죽음체험 교육을 하며, 죽음학회가 만들어지는 등 죽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일어나고 있다. 경제에만 치중했던 세태에서 벗어나 삶과 죽음이란 근본 문제를 살펴보기 시작한 사회적 흐름이 이번 판결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기계적 치료는 받지 않겠다'라는 김수환 추기경의 투병 자세가 세인들의 눈길을 끄는 것도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관심에서다.
"우리는 죽는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일상에 묻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이다. 죽음을 외면하는 경향이 죽음을 가장 많이 접하는 의료계에서 더 심한 것은 아이러니다.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의료계의 본질적인 관심사이고, 의학교육도 그렇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료진들에게 죽음은 정복의 대상이지, 앎의 대상이 아니다.
의료계가 죽음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거의 모든 죽음이 병원에서 일어나는데도 병실과 빈소 사이의 중간 단계인 호스피스실이나 임종실을 운영하는 경우가 극소수에 머물고 있다. 의사나 간호사들을 대상으로 한 죽음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죽음은 사회적 금기이다. 가능하면 숨기고 화제에 올리려 하지 않는다. 과거 뇌사에 대한 사망 인정 여부도 충분한 사회적 논의를 거치지 않았다. 이번 판결이 존엄사뿐만 아니라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해, 더 나아가 죽음 자체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둘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우리는 죽음을 잘 알지 못한다.
남경욱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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