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월 진주국립박물관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경남 창원시 동읍 주남저수지 인근에 도굴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 피해가 심각하니 현장 조사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움푹 파인 도굴갱들을 본 발굴단은 별다른 성과를 기대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1호묘 도굴갱 조사에서 2,000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우리나라 최초의 통나무 관(棺)이 발견된 것이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으로 발굴에 참여한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목관을 보는 순간 느꼈던 짜릿한 흥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목관을 들어낸 후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무덤의 바닥 한가운데에 구덩이가 있었고, 그 구덩이 속에 온갖 부장품들이 든 대바구니가 있었던 것.
2,000년 전에 문자가 사용되었음을 입증하는 붓과 각종 칠기, 창과 칼, 활과 화살 등 그간 공백기로 있었던 한반도의 고대국가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한국 고고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다호리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갈대밭 속의 나라 다호리' 전은 교과서에서만 보던 다호리 유적의 실체를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1988년부터 10년간 8차례에 걸친 조사 결과를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았다.
목제와 칠기 등 보존처리 과정에 시간이 오래 걸린 것들이 많아 처음 공개되는 유물도 여럿이고, 전시 준비 과정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도 많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청동칼과 철칼이 나란히 나와있다.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철광석과 망치는 다호리 사람들이 직접 국가 형성의 기본이 된 신소재인 철기를 제작했음을 보여준다.
나무로 된 도끼자루가 2,000년이 지나도록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은 다호리 유적이 습지에 조성됐기 때문이다. 습지는 물과 흙이 뒤섞여 밀폐에 가까운 상태이기 때문에 유물이 잘 훼손되지 않는다.
중국이나 낙랑과는 차별되는 독창적 기법이 사용된 다양한 칠기 제품도 눈에 띈다. 장식뿐 아니라 방습과 방수 등의 효과가 있는 옻칠은 제작이 까다로워 일부 계층에서만 사용됐다. 하지만 다호리 유적에서는 용기류 뿐 아니라 무기류와 붓, 부채 등에 광범위하게 옻칠이 사용됐다.
170㎝ 길이에 3㎝ 폭의 장궁(長弓) 1점과 단궁(短弓) 3점, 그리고 화살대와 화살촉 등도 전시돼있다. 장궁과 함께 원통형의 긴 화살통도 출토돼 한반도에서는 단궁만 사용됐다는 설을 뒤집었다.
제기로 사용된 칠기에 담겨있던 밤과 감, 율무는 다호리의 음식문화를 짐작하게 한다. 감과 율무는 성분 분석을 통해 실체가 드러났다.
다호리 유적의 하이라이트인 통나무 목관은 전시장 한가운데에 있다. 불순물을 제거하고 변형을 막는 용액을 소량씩 침투시키는 등 보존처리에 무려 20년의 시간이 걸렸다.
당시 350년 된 참나무로 만들어진 길이 2.4m 너비 0.85m 높이 0.65m의 이 목관은 원삼국시대 초기 목관묘의 실체와 장제를 알려준 귀중한 유물이다. 관을 내릴 때 사용한 동앗줄까지 함께 전시돼있다.
전시장의 마지막 자리는 다호리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다른 출처에서 습득된 각종 유물이 차지하고 있다. 발굴 이전에 도굴돼 세상에 나온 것들이다. 토기마다 어김없이 뚫려있는 도굴침 구멍이 안타까움을 남긴다. 전시는 2009년 2월 1일까지.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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