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그를 만나 문화라는 추상적인 실체는, 현실이 된다. 문화가 만질 수 있고 안아볼 수도 있는 어떤 것으로 다가왔다. 바로 그 일을 한국에서 처음으로 해 낸 그를 두고 '문화 기획의 효시'라 해도 전혀 민폐가 아니다.
완결된 극장 공연물로서의 판소리와 사물놀이, 공옥진의 병신춤, 현대 무용, 재즈 무대 등이 그의 머리와 손에서 나왔다. '문화 올림픽'이라고도 불리는 제3회 세계델픽대회의 제주 개최를 앞두고 준비상황 점검차 현지에 갔다 막 돌아온 강준혁(61ㆍ성공회대 문화대학원장ㆍ메타기획 컨설팅 고문)씨를 대학로의 메타기획 사무실에서 만났다.
- 언제나 바쁘다. 근황은 어떤가.
"2006년 문화예술위원회 1기 위원으로 위촉돼 지난 8월까지 3년 근무가 막 끝났다. 일부 '꼴통 언론'들이 좌익이 판친다며 난리를 쳤던 시기와 겹쳤다. 재임 기간 중 문예진흥원 시절의 방식을 탈피하는 데 최대의 역점을 뒀다. 공모-심사-지원이라는 기계적 시스템을 탈피하려고 애썼다는 말이다.
문화계에 실질적 도움을 줘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재정 문제는 물론 연습장 문제 등에 대해 수시로 관계자들과 만나 인터뷰했다. 해외 공연시 투어 매니지 문제까지 관여하고 상담 전문가 풀을 만들어 지원 희망자와 연결시켰다. 지금은 고문이다."
- 임기 종료를 앞두고는 딴 일까지 했다.
"지난 7월 몽골 나담 축제가 그것이다. 서구에 유일하게 알려진 몽골의 이벤트인데 몽골국립예술위원회ㆍ몽골국립예술대가 몽골 정부와 함께 치르는 행사다. 이전에는 경기만 했으나, 내가 코디네이터로 관여하면서 각종 공연도 보여준다.
한국 정부와는 무관한 것으로, 내가 바로 메타기획에서 했던 일의 연장선상이다. 열악한 몽골의 예인 돕기 사업도 2년째 해오고 있는데, 재정적으로 힘들다."
- 당신이 만든 히서연극상(올해 13회)의 시즌이 됐다. 연극인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상 아닌가.
"지난달 28일 열렸던 경매 행사 '메타와인파티'가 그 기금 마련을 위한 것이다. 관련 예술가들과 함께 소장품을 경매해 재원을 마련하는데, 올해 출품작 중에는 마티스의 '푸른 인간' 판화 등도 있었다. 상금 400만원이 이 같은 경매로 거의 충당된다."
- 1989년 메타기획을 띄우고 난 뒤, 어떤 일들이 벌어졌나.
"우선 '문화기획자'란 말을 처음으로 내걸었다. 좋건 싫건 내가 1대 문화기획자가 된 셈이다. 1990년 '예술의 영성'을 주제로 세계의 무속을 LA 아트페스티벌로 모아들인 이래, 93년 대전 엑스포, 95년 광복 50주년 전국 길놀이 등의 국가적 행사를 기획했다.
98년은 좀 독특하다. 그 해 아비뇽 축제가 한국 공연을 처음으로 공식 초청했는데, 한국주간 행사에서 예술감독을 맡았다. 안동탈춤축제, 문화예술기획자들의 모임인 다움예술연구회 일도 시작했다."
- '문화는 의도적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것을 한국사회에 처음으로 알린 셈이다. 어떻게 시작됐나.
"1977년에 문을 연 소극장 공간사랑이 출발점이다. 한국 사회가 절대 빈곤을 막 벗어나던 시기였다. 문화에 대한 에너지가 축적됐고, 젊은이들은 아르바이트를 통해 아쉬운 대로 경제력이 막 생겨나 그 주요 소비층으로 부상했다.
아직 대학로는 생기지 않았었지만, 연극이 갑자기 호황을 이뤘다는 점도 중요하다. 카페 떼아트르, 삼일로 창고극장, 드라마센터 등으로 구획지어진 실질적 축, '명동 문화 벨트'의 존재는 그 같은 변화를 웅변했다."
- 당신과 건축가 고 김수근씨와의 만남이 한국 현대 문화의 풍경을 바꾸지 않았나.
"김수근 선생은 국립박물관 초대 관장이었던 최순우 관장 등 어른들한테 문화의 정통을 익힌 분이다. 통 크고 문화에 대한 애착이 강하던 그가 세운 공간사랑은 당시 최신 음향기계,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등의 고가 기기가 실재하던 곳이었다.
그는 내게 '정말 좋은 공연'만을 항상 강조했다. 그가 77년 1월 공간사랑을 맡길 실무자를 물색하다 나와 만났다. 그가 나와 몇 마디 나누더니 '당장 내일부터 일하라' 고 하더라. 청년 백건우가 와서 연습을 겸해서 고가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길들이던 모습이 선하다."
- 공간사랑은 잡지 '뿌리깊은 나무'와 함께 1970년대의 숨통을 틔운 주인공이었다. 그곳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나.
"'뿌리깊은 나무'의 한창기 사장이 공간사랑의 단골이었다. 품격있는 문장을 추구한다는 그 잡지의 사시가 3차원으로 확산된 것이 공간사랑이었던 셈이다. 나는 전통을 존중하는 동시에 현대성을 추구한다는 기치 아래 공연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씨가 잡지 '공간'의 편집을 맡고 있었고, ?璲?강영걸씨가 78년 합류했다. 86년 김수근 선생이 사망한 후 10년의 공간사랑 활동을 접고 나는 3년 뒤 메타기획을 만들었다. 새로운 일을 해야만 하는 팔자를 타고난 듯하다."
- 요즘은 '기획자 권력'이란 말이 유통될 정도로 문화기획자들은 힘이 세다. 어떻게 보나.
"매우 안 좋은 말이다. 기획자가 만든 문화상품이 부를 창출하고, 관련 프로덕션이 문화를 쥐고 흔들기 때문이다. 특히 뮤지컬 등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의 경우에는 기획자들이 예술가들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원래 기획자에게는 홍보, 관리 업무는 물론 아티스트를 보호ㆍ육성하는 의무도 있다. 이제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가 된 뮤지컬은 태반이 잘못 가게 돼 있다. 예술가들을 언제나 대체 가능하다고 간주되는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작태다. 자라날 수 있는 기회를 아예 박탈하는 셈이다."
- 지금 세상이 그런 것 아닌가.
"그렇다. 세계의 전반적 흐름이다. 돈벌이 될 계획 세우고 그에 동조하는 투자자가 펀드를 제공, 돈으로 볼 것 만들어 파는 비즈니스가 이른바 공연기획이다. 거기서는 여러 투자자들이 손해 안 볼 상품 만드는 게 최선의 목적이다. 근본적으로는 인생 2모작, 3모작을 해야 하는 불안정한 사회구조 탓이다. 나는 후배들에게 가능하면 예술가를 소모시키지 말라고 강조한다."
- 한국 문화가 특히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일단 남보다 빨리 달려가는 데만 급급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문화에 대한 생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국제가를 웃도는 한국의 그림 가격은 화상들이 올려놓은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든 한국인한테만 넘어가면 속화된다는 인식이 퍼져 한국은 국제적으로 인정을 못 받게 된다. 한국 하면 악착같이 움켜쥐려는 나라라는 인식에서 오는 손실은 차 몇 대 더 파는 것으로는 도저히 감당 못 한다. 일본인이나 유대인의 현명함도 없다.
군사정권이 우리의 심성을 거칠게 만든 탓이지만, 이제는 숫제 정부가 나서서 '허브'니 '한류'니 너무 쉽게 말해버렸다. 결과적으로 미움(혐한 감정)만 사게 됐지 않은가. 6ㆍ25로 재즈와 콜라가 유입됐다. 이게 '미류(美類)의 정책'이라 했다면 한국인들이 견뎠겠나? 이제 아시아 문화를 위해 진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뭔가를 생각해야 한다."
- 해결책은 있는가.
"예술가 지원이 문화 향상의 지름길이라고 하지만, 진지한 예술교육 프로그램으로 향수자들을 먼저 키우는 수밖에 없다. 그 기회가 박탈된 한국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콘서트홀에서 박수를 열심히 치지만, (알고 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현시하는 유효한 기회로 연주회장을 택하는 것일 뿐이다. 어떤 종류의 공연물이든 한국에서는 그렇게 변하고 만다."
- 큰 일만 하는 것 같다.
"2006년 내 고향인 서천에서 1주일에 한번 꼴로 문화관계자 교육을 요청해 왔는데, 그게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그들을 위해 '지역다움 30년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마을 잔치, 귀농 희망자 교육 등의 사업을 펼쳐갈 계획이다.
이 같은 장기 프로젝트는 관에 의존하면 불가능해진다. 비도회지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 가진 한도 내에서 풍성하게 살 수 있는데도, 빈곤감에 사로잡혀 '머릿속이 꾀죄죄해진' 그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 그 일은 한국인이 이제 경제력에 걸맞는 격(생활 패턴)을 갖춰나가야 한다는 내 신념이 현실화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 새로운 도전 '델픽 게임'
"델픽 게임(Delphic Games)은 새 도전"이라고 강준혁씨는 말했다. 서울에 있어도 마음은 제주에 가 있을 만큼, 그는 요즘 이 행사에 마음을 쓰고 있다. 지난달 24일 출범한 조직위원회 위원장에는 작곡가 이건용씨가 선임됐고, 강씨가 예술총감독을 맡았다.
고대 올림픽 당시 함께 펼치던 문화경연대회에서 유래된 행사다. 현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탕 남작이 부활시켰으나 경제 난국으로 폐기됐다가 1994년부터 재개돼 그간 러시아, 말레이시아에서 행사가 열렸다.
3회 행사가 내년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한라체육관 등 제주시 일원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35개국에서 400여명이 참가해 '자연과의 조화'라는 주제 아래 기량을 겨룬다. 50개국에서 100여명의 언론인들도 방한해 취재 경쟁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음악 및 음향, 공연, 공예ㆍ디자인ㆍ시각예술, 소통과 사회예술 등 4개 영역에서 열리는 17개 부문의 '경연 프로그램'은 문화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는 한국에 그 인식의 지평을 넓혀줄 것으로 기대된다.
축제적 성격의 '페스티벌 프로그램'도 펼쳐진다. 시청각 예술 관련 포럼, 전통 불꽃놀이 등 다양한 형태의 18개 축제가 제주도의 풍광과 어우러진다.
"제대로 해내려면 대대적 준비가 필요하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해 그동안 고사해오다 최근에야 힘들게 수락했다. 서울, 제주를 시도 때도 없이 왕래하는 생활이 그 때문이다." 1년도 안 남아 난항이 예상되긴 한다.
그러나 강씨가 탄탄한 국제적 인력 커넥션을 믿고 응낙한 일이다. "내가 요구하는 조건은 다 들어주기로 돼 있다. 물론 아웃소싱도 가능하다."
"깔끔하고 멋있게, 즉 평균 이상은 되도록" 치러내야 한다는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일류급 인사들은 1년 전에 스케줄이 다 짜여 있는 터라, 그들을 모셔오는 게 현실적 문제다." 이런 일에 이력이 난 강씨지만, 그는 언제나 초심이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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