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미친 야생마'_신상옥 감독의 별명이다. 그리고 '최 여사'는 신 감독이 부인 최은희씨를 부르는 별칭이다. 야생마와 최 여사가 살아온 삶은 피할 수 없이 기구한 영화 같은 운명, 그 자체가 아닐까? 어쩌면 이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온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속에서 행복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야생마와 최 여사가 부부의 연을 맺고 처음 만든 영화가 '꿈'이라는 작품이다.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이들은 그토록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도 항상 꿈을 꾸듯 살아왔다. 2006년 신감독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 최은희 여사는 "그가 정말로 내 곁에 없는가"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자신들이 마치 500년을 살아 온 것 같다고 회고했다. 영화배우 김승호씨가 세상을 떠날 때, "할 일이 아직 많은데 너무 억울하다"고 유언을 했듯이 신 감독도 "영화가 나를 버리지 않을 때까지 작품을 만들어야 할 텐데"라며 눈을 감기 힘들어 했을 것이다.
영화와 사랑에 빠진 청년 신상옥과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배우의 길로 들어서서 가슴 아픈 경험을 한 최은희의 만남과 결혼, 그리고 북한에 납치된 뒤 9년 만에 탈출한 사실 등등은 너무 많이 알려져 있으니까 여기서는 생략한다. 대신 내가 만난 신 감독과 최 여사의 인간적인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회고해보려 한다.
대체로, "저 사람 완전히 미쳤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빠하는 것이 정상 일 테지만 신상옥 감독은 오히려 기분 좋아한다. "그래 나 미쳤다"가 그의 대꾸다. 어느 정도냐 하면,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여자 입장에서는 집에 근사한 가구를 들여 놓고 싶은 것이 당연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최은희씨가 평생 처음으로(최 여사의 표현임) 큰 마음먹고 화류장 한 세트를 사서 안방에 들여 놓았다. 그런데 신 감독은 화류장을 보자마자, "아, 이거 요새 내가 찍고 있는 영화에 소품가구로 쓰면 좋겠는데!"라고 말했다. 너무너무 실망한 최 여사가 발끈해 가지고, "안돼요. 절대 안돼요"라고 거절을 했다.
그러나 최 여사가 시장에 가느라고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신 감독은 조연출을 시켜 기어코 그 화류장을 가지고 나가 영화의 소품으로 쓰고 말았다. 기가 막힐 일이다. 하지만 그의 성품을 잘 아는 최 여사이기에 그냥 씩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로는 당분간 좋은 가구를 사지 않고 지내게 되었다.
나는 이분들한테 두 번이나 초청 받아 집에 간적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집 안에는 소박한 응접세트와 피아노가 있을 뿐 화려한 가구를 볼 수가 없었다. 벽을 하얀 색으로 칠한 단층짜리(내 기억으로는) 집에 들어서니까 신 감독은 나한테 술(아마, 코냑이었던 것 같다)을 한잔 따라 주었다. 최 여사는 "내 집을 갖게 됐다"는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했는데 그 모습이 내 눈에는 아주 아름답게 보였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처음 본 신 감독의 영화는 '젊은 그들'과 '어느 여대생의 고백'이었다. 그리고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은 내가 육군에서 군대 생활을 할 때 봤다.
나는 육군정보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이태원에 있는 육군정훈학교 기간사병으로 발령을 받아 복무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부대에서 명령이 하달되었다. 왕십리에 있는 광무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오라는 것이다. 입장은 무료고 감상문을 쓸 것도 없으니 부담 갖지 말고 구경만 하고 오라니까 신나는 일이다.
아마도 이승만 대통령을 위한 선거용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극장에 갔는데 나는 이런 내용을 극화로 만드는 신 감독의 연출 테크닉을 접하고 솔직히 깜짝 놀랐다. 잘못하면 다큐멘터리가 될 수도 있는 소재를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신 감독의 팬이 되었다.
'Day for Night'라는 촬영 기법이 있다. 밤 장면을 진짜로 밤에 찍으면 사방이 깜깜해서 곤란을 겪게 되니까 낮에 찍고 필터를 이용해서 밤 분위기를 내는 기술이다. 이 기술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 신 감독이다. 요새는 조명기술이 좋아서 밤에도 촬영을 하지만 60년대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영화에 미친 사람'은 사실 신 감독만이 아니다. 최은희씨도 미치긴 마찬가지다. 어쩌면 남편보다 더 미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 감독이 간염 판정을 받았을 때도, 사위의 간을 이식 받아 투병 생활을 할 때도, 미국에서 돌아와 전세방 생활을 할 때도, 남편에게 힘을 불어 넣어 주고 끝까지 영화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들어 준 사람이 최 여사이기 때문이다.
신 감독은 영화에나 미쳤지만, 최 여사는 연기와 무대에도 미쳤다. 그리고 나중에는 후진 양성에 혼신을 다 했다. 60년대에 안양영화예술학교 교장을 했고, 납북과 탈출 이후에 미국에서 舅?귀국을 한 뒤에는 안양경찰서 구 건물을 개조해서 안양 신필름 영화예술센터를 설립했다. 2001년에는 극단'신협'의 대표로 취임을 해서 뮤지컬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예술의 전당에서 제작하고 직접 출연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최 여사가 사무실로 나를 찾아 왔다. 그리고 불쑥 나한테 예쁜 포장지로 싼 선물을 줬다. "미국에서 오다가 정 선생 생각이 나서 사왔어요" 꽤 큼직한 선물인데 열어 보니까 동그란 벽 시계였다. "아니, 이렇게 큰 걸 가방에 넣어 오신 겁니까?" 크기만 하지 비싼 것은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라면서 내게 준 그 시계를 나는 지금도 벽에 걸어 놓고 있다. 매우 다정한 분이다.
나는 지금도 두 분들에게 각각 빚을 지고 있다. 내가 영상자료원 원장 재직 시절에 영화 '상록수'의 타이틀을 새로 만들어 드리지 못한 빚을 고(故) 신상옥 감독에게 지고 있고, 허구한 날 말로만 "소주 한잔 사 드릴께요"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빚을 최은희 여사한테 지고 있다.
하지만 최 여사 에게 지고 있는 빚 '소주 한잔'은 며칠 내로 곧 갚을 생각이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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