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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기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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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기러기

입력
2008.12.02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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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내 일찍이

백날의 밤 밝혀

스승의 필체 익혔더니

오랜 칩거의 방문 열고

마루로 나서는 날

사립 너머

겨울 하늘 한지 삼아

한 획, 한 획을

흐르는 물처럼

자유로이 풀어놓으시며

나는 기러기!

문득 가깝다

아득히 먼 스승의

말씀이여, 지혜여

추사의 제자 중에 조희룡이라는 중인 출신의 화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대 그림이 남다르다는 것을 간파한 한 벗이 어느날 그에게 물었다.

“그대의 대 그림은 누구를 본받았는가? 당연히 추사에게서 배웠으니 추사가 아니겠는가.” 이 질문 속엔 그러니 네 묵죽(墨竹)이 아무리 뛰어난들 선생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니냐, 이런 비아냥과 야유가 슬며시 뒤섞여 있다.

추사의 글씨와 그림만 잘 따라해도 한 세월 곤궁을 면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으니 추사 문하에 든 제자치고 그 어느 누구라도 쉬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희룡은 말한다. “내 대 그림은 스승이 없소. 스승이 있다면 저 공산의 만 그루 대나무가 바로 나의 스승일 뿐이오.”

책 속에 갇힌 문자향 서권기를 한 획 한 획 자유롭게 풀어놓는 기러기의 필법 앞에서 누가 감히 서예를 말하랴. ‘세상 사람들이 유자서(有字書)는 읽을 줄 알고 무자서(無字書)는 읽을 줄 모른다’는 <채근담> 의 한 구절이 있거니와, 대교약졸한 저 기러기 문하에 들어 한 말씀 익혀볼 만도 하겠다.

오랜 칩거 끝에 얻은 ‘문득’의 돈오(頓悟)라면 어떤가. ‘나는 기러기!’, 내 겨드랑에도 날개 비늘이 돋는지 근질근질하다. 점수(漸修)하듯, 제 몸을 후려치며 날아가는 겨울 하늘에 먹향이 번진다.

손택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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