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가운데로 공을 넘기란 말야. 미드필더한테 공을 줘야 패스를 제대로 할 수 있지. 전방에 있는 공격수들도 좀 움직여 줘야지 안 뛰고 뭐하냐. 그래서 팀플레이를 할 수 있겠어."
25일 오후 경기 이천 건국대 스포츠과학센터 내 인조잔디 축구 구장인 '황선홍 스타디움'. 벤치에선 갖가지 지적이 터져 나오고, 선수들은 불호령에 따라 빠른 몸놀림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실전 게임을 방불케 하는 그들의 플레이는 웬만한 프로축구 팀과 견주어도 별반 손색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들은 축구 선수들이 아니다. 한국야구위원회(KBO) 소속 심판들이다. 한해 정규시즌이 끝나고 프로야구 1,2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35명(1군 4심제 20명, 2군 3심제 15명)의 심판들이 모여 축구 등 마무리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해 평가와 내년도 심판진 운영 방침에 대한 밑그림도 이 때 그려진다.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로 자리매김한 프로야구는 올해에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수확을 거뒀다. 강호인 쿠바 일본 미국 등을 연파하며 '9경기 전승'이란 각본 없는 드라마로 금메달을 딴 베이징올림픽의 쾌거를 비롯해 13년 만에 '500만 관중 시대'를 다시 여는 등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프로야구의 영광 뒤에는 숨음 조역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바로 프로야구 심판들이다. 이들의 숨은 노력이 없었다면 국내 프로야구가 대박을 터트리며 '국민 스포츠'로 올라서기 힘들었을 것이다.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팀이 금메달을 땄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직접 경기장에 나가 싸우지는 않았지만 운동장에서 함께 했던 선수들이 쿠바 일본 미국 같은 강팀들을 차례로 물리쳤을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껴졌어요. 일반인이 느끼는 감정과는 좀 달랐죠." 20년차인 베테랑 오석환(45) 심판은 그 때의 감동이 다시 되살아 나는 듯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선수들과 직접 운동장에서 뒹굴며 씨름 하다 보니 어려움도 많다. 특히 많은 관중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경기의 승패가 결정돼 더더욱 그렇다.
"'잘해봐야 본전'이란 말이 있죠? 우리를 두고 하는 말 같아요.(웃음) 공정하게 하려고 애를 쓰지만 야구라는 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데다 간혹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거든요. 또 관중들 수준은 얼마나 높아졌는데요.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매 순간 집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 심판도 게임에 들어가기 전에는 긴장한다고 털어 놓았다. 각종 스포츠 케이블 채널도 신속하고 정확한 판정을 요구하는 감시관이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심판들도 타자가 친 타구의 방향에 따라 위치를 변경해 가며 최대한 오심을 줄이는 위치 포메이션을 연습 중이다. 해가 거듭될수록 야구장에서 판정시비가 줄고 있는 것도 보이지 않는 심판진들의 이런 노력 덕이다.
이런 노력에 비해 심판진의 근무 환경은 열악하다.
지방 경기가 잡힌 날이면 걱정부터 앞선다. 게임이 끝나면 땀으로 범벅이 되지만 지방 경기장엔 심판들을 위한 마땅한 샤워실 하나 없다. 4대 보험 혜택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KBO와의 고용형태가 계약직으로 돼 있어서 퇴직금이 없어 미래도 불투명하다. 1년에 총 211게임(1군 126게임, 2군 85게임)을 소화해 내야 하는 일정을 감안할 때 현재의 35명 인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또한 수도권과 지방을 오가야 하기 때문에 정규시즌(3~10월, 시범경기 포함) 기간 절반은 객지 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늘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 뿐이라고 털어 놓았다.
게다가 올해는 예산 부족으로 심판 충원을 위해 매년 이맘 때쯤 개최하는 'KBO 심판학교'도 취소돼 부족한 인력 보충도 물 건너갔다.
온라인에서도 심판진의 수난은 계속된다. 극성 팬들이 많은 팀의 경기를 맡으면 긴장감은 두 배로 커진다. "경기라는 게 이기는 팀이 있으면 지는 팀도 나오는 법이잖아요. 어쩌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지는 날이면 예외 없이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표현이 담긴 악성 댓글로 KBO 게시판이 도배됩니다. 일부 극성 팬은 그날 경기를 뛴 심판들의 집 전화번호까지 알아내 밤낮 없이 전화를 해 가족들까지 공포에 떨어야 합니다." 이영재(41) 심판은 극성 팬들의 무분별한 행위를 안타까워 했다.
그들은 그렇다 해도 프로야구를 사랑하는 대다수 팬들을 생각하면 초록 다이아몬드 구장에 들어서는 마음은 가벼워진다고 했다. 항상 모자를 쓰는데다 스트레스가 쌓여 대부분 심판들의 머리는 백발이 많다고 귀띔했다.
"심판의 매력이요? 희생이죠. 야구 경기는 선수들과 팬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가는 게임이잖아요. 우리는 그저 옆에서 그들이 한판 신나게 즐길 수 있도록 옆에서 조언해주는 역할만 잘하면 되죠. 언제나 그랬듯이 말입니다." 내년 시즌을 준비하기 위해 후배 심판들과 함께 회의실로 향하는 조종규(54) 심판 위원장의 뒷모습에선 세월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천=허재경 기자 ric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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