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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47> 무삭제 통과 '태' 정부기관서 재검열 분위기 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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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47> 무삭제 통과 '태' 정부기관서 재검열 분위기 감지

입력
2008.12.01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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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을 갖고 튀어라.’

30여 시간 전, 내가 필름을 들고 김포공항을 빠져 나오며 공중전화박스에서 아내에게 전화한 것이 생각났다. “오늘 못 들어갈 것 같아...” 영화검열장에서 벌어진 사태를 지켜본 나는 순간 위기를 느꼈다.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검열위원장이 사표를 냈고, 정부기관에서 만일 재검열을 하겠다고 한다면... 앞이 아찔해졌다.

나는 즉각 영사실로 달려갔다. 막 퇴근하려는 검열위원회 직원에게 “필름 가져가요.” 하며 달아나듯 필름깡통을 어깨에 메고 남산 영화검열위원회 건물을 달려 나왔다. 30킬로가 넘는 필름깡통이 솜사탕처럼 가벼웠다. 필름깡통을 껴안고 있는 나에게 운전기사가 물었다. “어디까지 가시죠?” 정신없이 올라탄 택시를 나는 내 승용차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다만 ‘이 영화를 살려야 한다.’ 우선 한국 밖으로 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아침,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당시 정보부원과 보안사령부 요원들이 영화계 소문을 가장 빠르게 알 수 있는 충무로 거리를 경찰의 수색용 개처럼 킁킁대며 다니고 있었다.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김포공항이요.” 마침 공항에는 동경으로 가는 KAL기 마지막 한 좌석이 남아있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마친 후 기체가 공항활주로를 이륙하자 비로소 '영화-<태> ’가 살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사람에게 생명이 있듯 작품에도 그 자신만의 생명이 있다. 창조자가 우주와 인간을 만들듯 작가는 그의 우주인 작품을 만든다. 작품은 작품대로 생명을 갖는다. 수많은 시간, 수많은 연기자와 스탭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화가 세상에서 빛을 보게 해야 할 책임은 감독인 나에게 있는 것이다.

동경으로 날아가는 기내에서 다음 행선지를 찾아야 했다. 문득 떠오른 곳이 독일 베를린이었다. 1년 전 베를린영화제에서 사귄 영화인들이 생각난 것이었다. 하네다 공항 로비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우선 베를린영화제 ‘곤돌프’사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나의 형편을 이야기하고 보호를 요청했다. 그는 쾌히 승낙하고 투숙할 곳까지 준비해 주었다. 내가 탄 ‘루프트한자’ 비행기가 베를린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나는 1년 전, 베를린영화제에서 만난 좋은 독일 영화인들을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검열문제로 시달려 며칠간 못 잔 잠을 기내에서 깊이 잘 수 있었다.

암흑 같은 밤, 베를린공항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승객들이 거의 다 내린 터라 겨우 서너 명이 트랩을 내렸다. 수속을 마치고 필름깡통을 멘 채 입국장을 빠르게 빠져 나왔다. 그 때, 내 발길이 못 박히듯 서고 말았다.

멀리서 검은 오버코트에 검은 모자를 쓴 남자가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동양인이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나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래간만입니다.” 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1년 전, 영화제에서 만났던 베를린주재한국영사관에 근무하는 중앙정보부 영사였다.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날아온 내 앞에 그가 나타난 것이다.

순간, 사고가 난 것을 직감하였다. 그는 웃으며 친척이 온다고 하여 공항에 나왔는데 승객 명단에 없어서 돌아가려다가 나를 발견하였다며 너스레를 떨고는 투숙 할 호텔에 태워주겠다며 필름 통을 잡았다. 나는 재빠르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서울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예요?” 잠시 일이 있어서 베를린까지 왔다고 하였다. 아내가 이어 떨리는 소리로 말하였다. “어서 전화 끊어요. 도청 당하고 있어요.... 제발 몸 조심 해요.”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다음날 아침, 베를린 영화제 사무국장을 만나고 난 후, 국내의 돌아가는 사정을 대강 알게 되었다. 예상대로 한국에서 나의 영화검열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그들은 반드시 필름을 압수해야 했다. 내가 필름을 들고 김포공항을 빠져나가 동경 행 비행기를 탔을 때 이미 정보망은 가동되었다. 정보부는 내 베를린행을 예측하고 정보부원을 베를린영화제사무국에 파견, 내 동태를 확인했던 것이다.

정보부원의 눈을 피해 나는 즉각 파리로 날랐다. 떠나기 전, 중앙일보 파리특파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길종 형의 친구 주섭일 형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섭일 형과 함께 칸느영화제사무국과 협상하며 불어 자막준비작업에 들어갔다. 투숙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호텔로비에서 베를린영화제에서 통역을 맡았던 재독 한국 유학생을 만났다. 그녀는 1주일 예정으로 파리여행을 왔다며 나를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그녀는 주독일한국영사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유학을 하는 학생이었다. 나는 곧 호텔을 옮겼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유학생이라는 신분으로 내게 접근, 감시하였다.

마침내 ‘TITRA FILM’에서 불어자막이 프린트에 입혀졌다. 비공식적으로 영화제에서 선정위원들이 영화를 심사하였다. 비경쟁부분 <주목할만한 시선> 에 선정하겠다는 ‘질 자곱’ 집행위원장의 의견을 주섭일 형이 전달해주었다. 영화를 살리려면 세계영화제에서 공개하여 세계 여론의 힘으로 한국정부가 영화에 손을 못 대게 하는 방법뿐이었다. 우선 영화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러나 한편 경쟁본선에서 세계적 감독들과 당당하게 작품으로 경쟁하고 싶기도 했다. 이미 베를린영화제, 시카고영화제, 겐트영화제 수상경력이 있는 나로서 비굴하게 칸느영화제의 2등급 부문에 출품을 감수하며 정부의 탄압을 ‘돌려차고’ 싶지 않았다. 1년 전, 베를린 밤거리에서 내가 뭐라고 소리쳤나.

송두율 선생에게 외쳤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라 욕, 나라 안에서 해라. 나쁜 정권이라고 생각하면 국내에서 죽기 살기로 싸워라. 그리고 이겨라. 나는 필름깡통을 다시 어깨 위에 올렸다. 3개월간의 유럽의 유랑생활은 춥고 배고팠다.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었고 재미교포친구에게 빌린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마저 바닥이 났다. 호텔에서 쫓겨나고 돌아갈 비행기 티켓도 없었다. 며칠째 공원을 헤매었다.

가족과의 통화가 끊어진 지도 한 달여가 지났다. 나의 마음은 굳어가기 시작했다. 저 추악한 자를 몰아내자고 하던 내가 아니었나. 그런데 현재의 나는 어떠한가. 악을 몰아내겠다던 내가 이젠 그들이 두려워서 도망자가 된 것이 아닌가. 체포돼도 좋다고 결심하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전화하지 말아요. 어제도 집으로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내가 말했다. “나, 지금 돌아간다. 드골공항 KAL 데스크로 귀국티켓 보내.” 나는 내 인생의 추락을 허락하였다. 귀국 후 나는 정부당국과 정면으로 싸웠고 언론 매체들이 그 배경을 추적하려 하였으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언론의 힘을 업고 싶지도 않았다. 오직 나의 영화정신으로 부패와 독재와 싸우고 싶었다. 국가정보기관 <블랙리스트> 에 내 이름이 올랐고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낙인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1986년 5월 이후, 나의 영화인생은 또 하나의 파란만장한 영화처럼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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