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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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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첫눈

입력
2008.12.01 00:09
0 0

김진경

길바닥에까지 전을 벌여놓은

마포 돼지껍데기집

빨갛게 달아오른 연탄 화덕을 끼고 앉아

눈을 맞는다

어허 눈이 오네

머리칼 위에 희끗희끗 눈을 얹은 윤가가 큰 눈을 뜬다

대장간에 말굽 갈아 끼러 왔다가

눈을 만난 짐말들처럼

술청 안의 사내들이 술렁댄다

푸르륵 푸르륵 김을 뿜어대기도 하고

갈기 위에 얹힌 눈을 털어내기도 하고

나는 화덕에 쇠를 달구는 대장장이처럼

묵묵히 화덕에 고기를 얹어 굽는다

길가의 플라타너스가 쇠의 녹슨 혓바닥처럼

남아 있던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풀무질을 세게 해서 저것들을 달구어야겠다

말랑말랑해진 혓바닥을 두드려 쇠발굽을 만들어야겠다

저 갈기 푸른 말들에 새 발굽을 달아주어야겠다

오늘 밤 눈 쌓인 재를 넘어 다음 장으로 가기도 하고

딸랑딸랑 말방울을 울리며 사랑하는 이의 집 앞에 멈춰 서기도 하리라

붉게 단 쇠말굽을 물에 담금질할 때처럼

연탄 화덕에서 푸르게 연기가 솟는다

남루하고 허름한 술청이다. 여기에 모인 중년의 사내들이 돼지껍데기를 굽는다. 사내들도 돼지처럼 속 다 내어주고 껍질만 남은 것 같다. 이 초라한 술청이 갑자기 “어허 눈이 오네”라는 반가운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화덕에서 푸른 연기가 솟는 대장간으로 바뀐다. 짐말이 된 사내들의 술렁임을 새 발굽을 달고 푸른 갈기 휘날리는 생의 활력으로 잇고 싶은 게 시인의 눈이다. 내리는 눈을 맞으며 화덕 위의 불이 타오른다. 눈과 불을 만나게 하는 시인의 힘찬 풀무질이 그 어떤 ‘말랑말랑한 혓바닥’보다 더 싱싱하게 다가온다. 첫눈에 술잔을 기울인 뒤 눈 쌓인 재를 넘는 사나이들의 활달한 서정에 모처럼 크게 취한다.

손택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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