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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법관 평가제의 함정

입력
2008.12.0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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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불법 연행된 대학 교수가 국가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증인으로 채택된 적이 있다. 안기부 발표대로 기사를 썼다가 오보(誤報)를 하게 된 취재 기자로서 보도 경위 등을 증언했다. 증언 도중 판사가 질문을 했지만, 혼자 중얼거리듯 말해 잘 알아 듣지 못하는 바람에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판사는 "증인은 기자이고 법조를 담당한다는데, 내 말 뜻이 이해가 안 되나요?"했다. 당혹스러웠다. 재판 시작부터 판사는 뭔가 못마땅한 듯 원ㆍ피고 측 변호인들을 다그쳤다. "답변 자료가 부실하다""재판 쟁점을 잘 모른다"는 등 핀잔과 면박을 주기도 했다. 변호사들은 판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변호사의 평가 믿을 수 있을까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연내 실시를 목표로 추진 중인 변호사에 의한 '법관 평가제'가 시행 중이었다면 어땠을까. 판사는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고, 변호사와 증인에게 정중한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또 소송기록을 꼼꼼하게 검토한 뒤 변호사들이 쟁점을 쉽게 파악해 변론서를 낼 수 있게 해 줬을 것이다. 시간에 맞춰 정확히 법정에 들어서고, 재판 도중 절대 조는 일이 없으며, 소송당사자나 증인이 법률 용어나 절차를 잘 모르면 친절하게 설명도 해줬을지 모른다.

변호사는 '법관 평가서'의 수십 개 항목에 모두 높은 점수를 매겼을 것이다. 소송 당사자나 증인 입장에서도 그런 법정 분위기는 꽤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변호사의 법관 평가 뒤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변호사의 법관 평가는 변호사가 제3자로서 객관적이고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거나 그런 위치에 있느냐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변호사는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판사 검사와 달리 소송 의뢰인을 대리해 재판에 임한다. 바꿔 말해 변호사는 소송 의뢰인에게 법률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는 사업자다. 대부분 재판에서 이기느냐 패하느냐에 따라 이익의 규모가 달라진다.

최근에는 저작권 침해 네티즌들을 무차별 고소하는 등 아예 '돈 되는'사건을 적극 발굴할 정도로 이익에 집착한다. 변호사가 소송의 승패를 결정 지은 판사를 공정하게 평가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송에 져서 손해가 막심해진 변호사에게 판사가 어떻게 비칠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형사소송은 또 어떤가. 민사소송은 원ㆍ피고 양측 변호사가 있어 평가를 비교할 수나 있다지만, 형사소송 법정에는 피고인 측 변호사밖에 없다. "반성의 빛이 없다"며 판사가 검사의 구형량보다 무거운 형을 선고해 피고인의 원망을 사게 된 변호사가 있다 치자. 그가 작성한 법관평가서가 객관적이고 공정할 수 있을까.

더 중대한 문제는 판사가 변호사의 평가를 의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법률과 양심에 의해 심판하도록 헌법이 보장한 판사의 독립적 재판 활동을 위축시키고 재판의 공정성을 훼손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변호사가 법정에서 판사의 승진ㆍ전보 등 인사에 반영되거나 법원 내부 평가에 참고자료로 활용될 수 있는 법관평가서를 펼쳐 놓고 있는 상황에서 평가를 무시할 수 있는 판사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양심적이고 소신 있는 판결을 기대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이것이 과연 전체 국민과 소송 당사자에게 이로운 일일까.

그 제도 아니라도 방법은 많아

변호사들이 법관을 평가하겠다고 나선 정확한 속내는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언급했듯이 '문제가 있는 판사'는 극소수다. 더구나 각종 시민단체, 이익단체 등에 의한 법정 모니터링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요즘이다.

법정에서 부적절한 언행을 하고, 불공정하고 편파적으로 재판을 진행하는 사례를 근절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해당 판사를 대법원 등에 신고해 인사상 불이익을 주거나 징계를 받도록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다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빈대를 잡으려면 빈대 잡는 약만 뿌리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황상진 논설위원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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