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서울, 아름다운,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나의 서울아/네 품에 아무리 춤추는 바보와 술 취한 망종이 다시 끓어도/나는 또 보았다./우리들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을…/그리고 나는 외친다./우리 모든 인민의 이름으로/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우리들은 얼마나 이것을 바라는 것이냐./아,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앞부분과 뒷부분 생략). 오장환(1918~1951)의 시집 <病든 서울> (1946년)에는 19편의 시가 묶여 있다. 그 중 세 번째가 '病든 서울'이며, 인용한 것은 전문 9개 연 가운데 여섯번 째 연이다. 病든>
■1982년 여름 전북 전주-군산 시외버스에서 유인물(?)이 몇 장 발견됐다. 안내양이 주워 읽고 '인민'이라는 표현에 겁 먹어 파출소에 신고했다. 경찰은 친분이 있던 모 대학 철학과 교수에게 자문했다. 오장환이라는 이름도 몰랐던 그 교수는 "지식인 고정간첩의 국가전복 기도 유인물같다"고 진단했다. 군산제일고 교사 이광웅(1940~1992) 시인이 짐을 정리하다 소년 시절 시집 <病든 서울> 을 베껴 놓았던 낡은 노트를 발견했고, 이를 복사해 간 동료 교사가 한 학생에게 '어머니'라는 시를 읽어 보라고 건네줬는데 버스에다 흘린 것이었다. 病든>
■석 달 이상 추적 끝에 경찰은 이 씨의 노트를 찾아냈다. 이 씨와 함께 독서클럽을 꾸려온 현직교사 8명과 전직교사 1명이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를 건설하려는 국가전복 혐의로 구속됐다. 그 해 4월 19일 이들 중 몇 명이 학교 뒷산에서 4ㆍ19가 기념일에서 제외된 것을 한탄하며 막걸리를 마시고 조출한 '4ㆍ19 기념식'을 가졌다. 이 때 5ㆍ18 이야기가 나왔고 희생자를 위해 잠시 묵념을 했다. 막걸리와 묵념이 '5ㆍ18 위령제'가 됐고, 주위에 있던 5그루의 소나무 때문에 독서클럽이 '오송회(五松會)'가 된 것을 기소되면서 알게 됐다.
■지난 25일 '오송회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 9명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43일 간의 고문으로 만들어진 사건이었기에 당연한 판결이었지만, 판사가 그 때의 재판이 잘못됐다며 공개적으로 반성한 대목이 관심을 끌었다. '病든 서울'은 파렴치한 인간이 득세하고 정치인이 권력욕에 날뛰는 해방 직후 사회를 묘사했는데,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빨갱이 시' 낙인이 찍혔었다. 1989년 월북문학이 해금됐고, 12년 전부터 매년 오장환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그의 시는 이제 대입수능시험의 주요 예상문제로까지 다뤄진다. '病든 서울'이 조금씩 치유돼가고 있다.
정병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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