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수도는 베를린이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나 뮌헨 같은 '지방도시' 시민들이 베를린이나 그 둘레에 사는 사람들을 선망할 것 같진 않다. 제네바나 취리히 같은 '지방도시'에 사는 스위스인 역시 수도 베른의 시민들을 부러워할 것 같지 않고, '지방도시' 안트베르펜에 사는 벨기에인 역시 수도 브뤼셀의 시민들을 질투할 것 같지 않다.
이 나라들은 연방국가들이니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연방국이 아닌 일본에선 어떨까? '지방도시' 교토에 사는 이들이 수도 도쿄에 사는 이들을 선망할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간사이 지방과 간토 지방의 전통적 라이벌 의식을 생각하면, 선망보다 흠잡기에 더 관심이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일본이 유럽 바깥에서 전형적 봉건제를 겪은 매우 드문 나라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으리라.
통제력 바깥의 수도권 구심력
한국은 어떤가? 나 자신이 서울에 살고 있어서 말하기가 조심스럽긴 하지만, 수도권에 대한 수도권 바깥 사람들의 선망과 질투는 아마 세계 최고 수준일 것이다. 그럴 만도 하다. 강준만의 근저 <지방은 식민지다> 가 인용하고 있는 조명래의 <현대사회의 도시론> 에 따르면, 2002년 현재 서울은 한국 중앙행정기능의 100%, 경제 기능의 76.1%, 정보기능의 93.6%를 지니고 있었다. 수도권의 면적은 국토의 12%에 지나지 않지만 2007년 현재 전체 인구의 48.6%가 이곳에 산다. 대한민국은 수도권의 구심력이 드세기 짝이 없는 서울공화국인 것이다. 현대사회의> 지방은>
역사적 연원이 어디에 있든(지방분권적 봉건제 전통의 부재, 즉 지속적인 중앙집권주의가 한 원인이 될 수 있겠다), 수도권이 나날이 비대해지고 지방이 점점 여위어가는 직접적 원인은 중앙정부의 수도권 중심 정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강준만은 지방 사람들에게 이제 '서울 탓'보다는 '내 탓'을 더 하자고 호소한다. <지방은 식민지다> 에서 그는 지방이 대한민국의 '내부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언론에 걸쳐 파헤친다. 지방은>
그리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세련된' 해결책을 내놓는다. 해결책의 큰 테두리는 지역주의를 지방주의로 바꾸는 것이다. (대구 출신 인사들이 중앙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지역주의자다. 반면에 대구든 어디든 수도권 이외 지역이 문화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수도권에 맞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방주의자다.)
그러나 그 해결책의 각론 가운데 만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지역언론운동이나 '문화 거버넌스' 같은 거창한 일만이 아니라, 공공적 연고주의, 암묵지의 공유, '고향기부마케팅'처럼 비교적 자잘한 일도 실천에 옮기기 어려울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강준만이 생각하는 것만큼 선하거나 공적(公的)이지 않기 때문이다.
강준만도 자신이 내놓은 지방의 내부식민지 탈피 방안을 마법의 지팡이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자신이 더러 쓰는 표현대로, (서울공화국에 치여) 죽더라도 이유는 알(리)고 죽자는 취지에서 책을 썼을 것이다. 나는 <지방은 식민지다> 를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특히 수도권 바깥에 사는 사람들이 읽기 바란다. 지방은>
지방주의와 내부식민지 해방
1980년대 한국노동운동을 좌편향으로 이끄는 데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이가 경기도지사가 돼 "중국 공산당도 우리 같은 규제는 안 한다"고 말해도 그게 스캔들이 되지 않는 사회가 한국이다. 대중은 그들 자신에게 걸맞은 정부를 갖는다는 금언은 상투적인 만큼이나 옳다. 지방선거에서든 대선에서든, 한국 유권자들은 제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는 가장 비루한 인격을 체화한 이들에게 권력을 위임했다.
'지방 살리기'라는 인기없는 주제를 가지고 지방에서 고군분투하는 강준만을 생각하면, 서울에서 논평질이나 하고 있는 내 모양새가 계면쩍다. 그러나 지방은 앞으로도 식민지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좋은 의미의 지방주의자로 변하지 않는 한.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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