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고기는 갖은 양념이나 촉촉한 육질 때문에 맛이 있지만, 불고기를 맛있게 만드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바로 내 눈 앞에서 불을 피워, 내 손으로 고기를 뒤적여 익힌다는 점. 야들야들한 촉감을 중시한다면 불에 올려두고 앞면 한 번, 뒷면 한 번 구워 바로 입으로!
좀 더 익힌 안정적인 맛을 좋아한다면 거기서 한 번 더 고기를 집적대다가 간장에 톡 찍어 먹는다. 불고기나 부대찌개처럼 상 위에 불을 피워 원하는 만큼만 익히고 끓이면 되는 음식들은 그래서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내 입맛에 '맞춤'하여 먹는 음식들.
■ 도쿄의 별미 몬자야키
일본 음식 가운데 '오꼬노미야키'라는 이름의 부침개가 있다. 기본적인 부침개 반죽에 토핑과 소스를 얹어 철판에 지져 만든다. 수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대학가나 강남역 등 젊은이들이 모이는 동네에는 이런 일본식 부침개를 먹을 수 있는 곳들이 속속 생겨났다.
하지만 도쿄의 전통 먹거리로 자부심이 대단한 '몬자야키'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마즙, 밀가루, 전분이 반죽의 기본을 이루는 '몬자야키'는 일반적인 부침개들에 비해 묽고 부드럽다.
반죽이 너무 묽어서 꼭 치즈를 얹어 주어야 한다. 얇은 반죽 덕분에 금방 물리지 않고 몇 개든 부쳐 먹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기본 반죽에 얇게 다진 피자 치즈(모짜렐라)를 뿌리고 명란, 잔 새우, 볶은 돼지고기 등 다양한 토핑을 입맛에 따라 얹기만 하면 된다.
단, 묽은 반죽으로 스며든 치즈가 녹으면서 철판에 눌러 붙고, 급격히 타들어 갈 수 있기 때문에 쉬지 않고 철판을 긁어 주어야 하는 것이 단점. 하지만 부침개의 크기도, 맛도 내 멋대로 만들어낼 수 있어서 먹는 내내 모두가 즐거워하는 메뉴다.
■ 전골을 비롯한 냄비요리
겨울이 왔구나 싶으면 나는 전골이 먹고 싶다. 빙 둘러앉은 식탁 가운데 불을 붙이고, 푸짐하게 채운 냄비를 올려 끓이며 먹는다. '찌개'라 불리지만 전골의 형태에 가까운 부대찌개, 깔끔한 쇠고기 국물에 국수를 말아먹는 국수전골, 영양 많은 저칼로리 두부전골과 버섯전골, 체력 보충에 좋은 곱창전골 등 갖은 전골류가 다 먹고 싶어진다.
우리는 식탁에서 끓여가며 먹는 것이 일상에 가깝지만, 외국인들은 곧잘 놀라곤 한다. 생각해 보면, 불을 키워 한소끔 끓이다가 불을 줄여 온도를 유지하고, 육수가 너무 졸아들면 추가로 국물을 더 붓고 다시 한 번 끓인다.
야채는 익는 순서대로 넣을 줄 알고, 다진양념이나 고춧가루 등의 기본양념도 내 입맛에 맞게 조절할 줄 안다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전골'이라는 형태의 음식을 먹어 왔지만, 전골을 먹는 방법 자체가 '요리'라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가사일도 못 할 것 같은 아저씨들도 소주 한 잔에 전골을 끓이는 모습을 보면, 요리사가 따로 없다. 국물이 졸았다, 짜다, 싱겁다, 풋고추를 좀 넣자, 국수는 지금 건져라 하면서 입맛에 딱 맞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들 낸다. 세상 어느 나라에 우리처럼 온 국민이 불 다룰 줄 알고, 간 볼 줄 알겠나? 생각해보면 으쓱할 일이다.
■ 퐁뒤와 훠궈
프랑스나 스위스에서 많이 먹는 '퐁뒤(fondue)'. 치즈에 화이트 와인을 부어가며 녹인 다음, 녹인 치즈를 담은 냄비를 작은 불에 올려 가열해가며 빵을 찍어 먹는다. 왕창 녹인 치즈에 빵을 찍어 먹는다니 언뜻 생각하면 느끼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백포도주를 섞어 새콤한 맛이 더해지니 빵을 톡톡 찍으면 마냥 먹게 된다.
비교적 덜 알려진 '고기 퐁뒤'도 있다. 고기 기름을 녹인 지방 등을 섞은 기름을 데워가며 고기를 찍어 익혀 먹는 방식이다. 작은 냄비에 자글자글 기름이 뜨겁고, 긴 꼬챙이에 깍둑 썬 고기를 하나씩 꿰어 기름에 톡 담가 익힌다. 소스나 소금, 후추 등을 찍어 먹는다.
식탁에서 끓여가며 먹는 음식 중에 또 '훠궈'가 있다. 중국식 보양식으로 알려진 훠궈는 태극 문양으로 생긴 깊은 팬이 둘로 나눠져, 맑은 육수와 매운 국물이 담겨 나온다. 팔팔 끓여가며 준비된 채소며 두부, 고기를 잠깐씩 국물에 담가 익혀 먹는 요리인데, 국물을 낼 때 각종 한약재가 들어가기 때문에 보양식이 따로 없다.
특히 얇게 썬 양고기를 맛이 깊은 훠궈 국물에 담가 익혀 먹으면 양 특유의 냄새가 한약재 우린 국물에 누그러져 부드러워진다. 영하 10도였던 어느 겨울 대련에 갔을 적, 온 몸이 얼어붙었던 나를 살린 '약 같은 음식'이 바로 훠궈였다.
이 밖에도 신당동 스타일의 즉석 떡볶이나 태국식 '수키' 등, 내 손으로 내 입맛에 맞춰 요리하며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은 얼마든지 있다. 사회가 점점 편리해지고, 사람 손을 대신하는 컴퓨터 시스템이 등장한 마당에 굳이 내 손으로 굽고 끓여야 하는 번거로운 메뉴들이 인기를 잃지 않는 이유가 무얼까?
녹인 치즈에 빵을 찍다 옷에 흘려도, 국수 전골을 떠 먹다 국물이 튀어도, 몬자야키 부치는 일에 서툴러 치즈가 철판에 눌어 붙어도 그 자체로 즐거운 추억이 되기 때문 아닐까. 추억이 섞인 맛은 언제고 또 먹고 싶어진다.
박재은ㆍ음식 에세이 <밥 시> 저자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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