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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3> 국악인 이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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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기자의 다시, 길을 떠나다] <3> 국악인 이생강

입력
2008.11.26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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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강(71)씨의 전용 서류봉투는 너름새 큰 주인을 닮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 산조 보유자'라는 공식 칭호와 함께 '한국전통민속악연구원 원장'이란 직함이 보인다.

'죽향(竹鄕)'이라는 호 아래로 이어지는 연락처 난에는 휴대폰 번호도 엄청 크게 찍혀 있다. 바싹 들이대고 봐야 분간이 가는, 항간의 명함 글자 양식을 대놓고 비웃는 듯.

그의 정체성은 강하다. 그가 "오늘은 할 말 해야겠다"며 팔을 걷어부쳤다. "전에는 후배들 위해 말을 아꼈지만, 60년 몸 담아 온 민속악의 참상을 더는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인간문화재로서 국악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돕는 게 내 소명"이라고 곱씹듯 말했다.

- 국악이 대중에게 노출되는 빈도가 훨씬 늘지 않았나. 아직도 할 일이 그리 많은가.

"사실 '국악'이란 말부터가 혼돈스럽다. 그 말에는 내 관할인 민초들의 음악이 도외시돼 있다. 지방별, 유파별 구분은 물론 기악ㆍ판소리ㆍ농악ㆍ경기민요ㆍ남도 육자배기 등 그 풍성한 자산과 엄청난 갈래를 도매금으로 매도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

- 민속악 연주자들은 얼마나 되나.

"전국의 민속악 관현악단에 소속돼 있는 사람들 1,000명 남짓을 민속악의 제도권으로 칠 수 있다. 그 밖에 '한 판' 펼칠 기량을 갖춘 창악자(소리꾼), 국악관현악단 단원 등 독주 능력이 되는 악기 연주자들, 농악ㆍ무용 분야 등이 각각 1,000여명 되는 것으로 본다. 제도권 밖에서 직업적으로 국악을 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3,000여명으로 추산된다는 계산이다."

- 대학쪽으로도 많이 흡수돼 있지 않나.

"추계예술대, 이화여대, 서울대, 중앙대, 동국대, 한양대 등 학교별로 160여명씩 해서 1,500여명이 더 있긴 하다. 그 밖에 나처럼 인지도 있는 무소속이 20명 남짓이다."

- 그렇다면 그 좌장 격인 인간문화재의 실제적 생활은 어떤가.

"문화재청에서 한 달에 100만원을 지급한다. 보유자의 생활비가 아니라 계승ㆍ연구비 명목이다.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해야 한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고 정책 입안자들은 노래를 부르지만, 그나마 정악 쪽일 뿐 민속악 쪽은 완전히 찬밥 신세다. 나라 밖에서 받던 갈채는, 나라 안으로 들어오면 무색해진다."

- 현 정부가 국악을 홀대한다는 말이 종종 제기되는데.

"이전 정부와의 비교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DJ는 국악 교육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IMF 때문에 여의치 못했고,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내가 대금을 직접 선물로 주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MB는 달랐다. 그의 대선 캠프에서 문화인들의 의견을 청취했을 때, 나는 '우리의 음악은 우리의 언어'라며 '국악인이 국악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소리를 했다. 요새 초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국악을 빼자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이 정부는 비문화적 접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 이생강 대금에서는 흥겨운 '대니 보이'도, 구성진 '칠갑산'도 나왔다. 고유 문화를 변형하는 것은 본인의 장기인가.

"그렇다. 크로스오버란 말도, 가요나 재즈와의 만남도 실은 내가 최초로 했다. 퓨전의 선각자라고 자부하는 이유다. 1950년대 미군부대 위문공연 때, 출연자들이 옷을 갈아입는 시간에 즉흥으로 했던 독주가 시초였다. 또 정규 국악 무대에서는 내게 독주 기회가 마련되지 않아 무용이나 민요 무대에서 특별 요청이 들어오면 들려줬다.

그러나 재미나 인기를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내가 독주자의 길을 걷게 된 것도 그런 무대가 계기였다. 공무원들 앞에서 대금으로 산조, 민요, 가요, 팝 등을 한번 연주해 주면 다들 뒤집어진다. 우리 음악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나는 '최후의 테크닉'을 연습해 왔다."

- 당신의 음악은 언제나 타 장르의 고수들과 당당히 겨루는 현장의 예술이었다. 어떻게 그런 기량을 익혔나.

"나는 당대 최고의 스승들을 모셨다. 단소, 소금, 대금, 태평소 등 7가지 관악기를 8도에서 최고로 연주하던 스승 23명을 6ㆍ25 피난지 부산에서 만났다. 장기 투숙 중이던 남포동 등지의 여관방을 전전하며, 국악의 전부를 담은 23유파의 정수를 익힌 셈이다. 특히 무용음악을 전문으로 했던 나는 최승희 시대 음악의 정수를 고스란히 익혔다."

- 그런데 왜 '외도'했나.

"전통은 세월 따라 변한다. 음악 역시 시대에 맞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골동품으로 남는다. 단 원형을 놓쳐서는 절대 안 된다. 연습을 엄청나게 해, 비국악적 음악으로 대중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국악 특히 민속악은 교육이 아니라 산 예술이기 때문이다. 시대에 맞는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애초 비판은 각오했다."

- 일종의 위기위식인가.

"그렇다. 6ㆍ25를 계기로 세계 문화가 물밀 듯 오다 보니, 우리에게는 고유의 문화를 회복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 7월 13일(그는 정확히 날짜를 기억했다) 파리 공연에서 갑자기 맹장 수술을 받은 단원의 대타로 나선 이래, 1968년부터 세계 순회의 기회를 얻었다. 트인 눈을 갖게 된 것이다."

- 그렇다면 국악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초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국악을 빼자는 말이 나오는 것은 구렁이 담 넘듯, 서양 음악이 독식하려 드니 생긴 일이다. 배웠다는 몰지각한 인간들이 나서서 그런 말을 하는 세상이 됐다. 나를 보라. 60년 음악을 해도 끝이 없다. 민초의 음악이 없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기초 언어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유아적부터 우리 것을 즐기고 자꾸 듣도록 해야 한다. 단소랜드(www.dansoland.com)의 '이생강 단소 교실'을 비롯해 여타 매체의 다큐나 국악 특집방송 등에서 강의나 연주 기회가 주어지면 나는 다 해낸다. 물론 대중의 관심이 대전제다."

- 방대한 사업이다. 인간문화재라는 타이틀만으로 가능한가?

"내 연주를 특히 좋아하던 모 기업 회장이 민속악예술대학과 관광객 유치를 겸한 전수관을 지어주겠다고 1대 1로 약속했으나 급서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러나 대학 건립의 꿈은 내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는 꼭 끝을 보고 싶은 심정이다."

- 중국에서 온 불량 단소가 우리의 귀를 망쳐놓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음정 조율이 안 된 중국 단소들이 문제다. 수입품 중 과반수는 소리가 맞지 않다고 봐야 한다. 사실 국악 최대의 과제는 시대 조류에 발맞춘 작곡과 창작인데, 중국 제품은 그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19일 조상현 판소리 특별 찬조 무대에 섰다. 12월에도 마산에서 열리는 원로 무용가 이필의 선생 60주년 기념공연, 송년무대 등이 기다리고 있다. 쉴 팔자는 못 된다.

●'기록과 교육'에 심혈

이생강씨는 1980년대 풍을 두 차례 맞았다. 목숨의 위협보다도, 자신의 예술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정신없이 다니던 연주활동을 줄이고, 기록과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 것은 그래서다.

"전성기의 음악을 기록해둬야 한다"며 만든 것이 그의 '한국 무용 음악' 전집(신나라 발행)이다. 홀대를 받고 있는 민속음악의 매력을 떨쳐보이겠다는 일념으로 만든 50장짜리 CD다. "아쟁의 고 윤윤석, 장고의 내 동생 성진 등 민속악 연주의 고수들과 8년 걸쳐 작업한 결과"라고 그는 말했다.

지난해 6월에야 끝난 녹음은 그러나 과부하였다. "집을 저당잡히고 세입자들의 전세비를 올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사채까지 끌어 쓰다 보니 아예 녹초가 됐다." 그것이 재정 보조를 받을 수 있는 사업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마음 고생은 덜 뻔했다.

산조춤, 민요춤, 무당춤, 승무, 창작무 등 50여 종의 무용을 받쳐줄 반주음악 1,000여곡은 그 자체로도 방대한 분량이지만, 쓰임새에 맞게 편집한다면 거의 무궁무진하다는 설명이다.

50장에 70만원의 가격이 매겨진 이 음반들은 우선 고전 무용음악의 1차 자료로 긴요하게 쓰일 전망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생긴 부채 14억원으로 칠순의 거장은 마음이 편치 못하다.

또 하나. 그가 '단소랜드'의 이름으로 만든 단소다. "PVC 5,000개, 대나무 5,000개로 단소를 만들어 '인간 문화재 이생강'이라는 도장을 찍어 나간다. 1만개나 되는 단소를 내가 직접 1주일 동안 꼬박 체크했다." 이름값이 그래서 무섭다. 후학 양성의 터전으로 만든 '이생강 단소 교실'을 위한 구체적 작업인 셈이다.

장병욱 기자

사진 김주영인턴기자(고려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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