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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사라진 밍크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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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사라진 밍크이불

입력
2008.11.26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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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심

그 시절, 어지간한 집엔

장롱마다 그 놈이 살고 있었다

반듯하게 펴려 해도

꼭 어딘가 한 군데는 주름져 있던

털이 여러 군데로 쓸려져

보는 방향에 따라 모습이 달랐던,

가을철에 장롱에서 기어 내려와

겨울 지나 봄까지

방바닥에서 온갖 게으름을 피우며

개어지는 법 없이

아랫목에서 윗목으로 또르르 또르르

몇 년이 지나도 빨지 않아

털이 송곳처럼 딱딱해지던 밍크이불,

말뿐인 밍크이불

한번 물을 먹으면 너무 무거워

빨랫줄에 걸 수 없었던 짐승,

장사하는 엄마 따라 시장에 나가

한겨울 사과를 덮다가 배추를 덮다가

털갈이를 끝내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던 밍크이불,

너무 순해서 내 동생 같았던

진짜 밍크 같았던

겨울철 집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찾던 게 밍크다. 연탄을 아끼기 위해 탄 구멍을 막아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밍크는 항상 언 손과 언 발을 녹일 만큼의 온기를 품고 있었다.

'방바닥에서 온갖 게으름을 피우며/ 개어지는 법'이 없던 밍크의 못 말리는 게으름을 우리는 얼마나 사랑했던가. 비록 인조털이었지만 부드럽고 아늑한 털을 둘둘 감고 있으면 몸도 마음도 한결 포근해지곤 하였다. 그 속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밥그릇을 품었고, 누이들과 나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그림일기 숙제를 했다. 먼지투성이 밍크의 목욕을 시킬 때는 너무 무거워 온 가족이 다 동원되어 연례행사를 치렀는데, 볕에 포슬포슬하게 마르는 밍크 털을 보고 있으면 온 집안이 다 개운해지는 듯했다.

살림살이가 좋아지면서 실외로 쫓겨난 밍크는 재래시장 같은 데서 겨우내 얼어붙을지도 모를 사과와 배추를 덮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말뿐인 밍크지만, 진짜 밍크 같았던, 그 순하고 착한 짐승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손택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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