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오 국회의장은 9월 새로 부임한 신해룡 국회 예산정책처장에게 "정부가 의원에게 로비하는 것이 아니라 예산정책처에 로비하도록 만들라"고 주문했다. 예산 편성 및 집행 평가 분야에서 의원들의 의정 활동을 지원하는 조직인 예산정책처의 중요성을 조금 과장해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3개월여가 지난 지금 이는 현실이 됐다. 예산정책처는 요새 정부 부처도 눈치 보게 만드는 막강한 파워기관으로 급부상했다.
과거 국회가 정부에서 넘어 온 예산과 법률안에 도장만 찍어 줘 통법부(通法府)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시절이 있었다. 반면 미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통령 중심제이지만 예산 편성은 의회의 영향력이 더 크다. 대통령 산하 예산관리처(OMB)가 예산제안서를 의회에 제출하지만 이는 참고사항일 뿐 예산을 편성하고 확정하는 권한은 의회가 갖고 있고, 여기서 의회예산처(CBO)의 역할이 크다. 한국 국회의 예산정책처는 2003년 미국 CBO를 본 떠 만든 기관이다.
예산 심의 시즌인 요즘 국회 의정관 안에 자리잡은 예산정책처 사무실에서는 정부 정책이나 예산 자료를 싸 들고 와 담당자를 설득하는 정부 부처 공무원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예산정책처가 최근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내는 각종 보고서와 현안 분석 자료들 때문이다. 그것도 정부 예산 편성이나 사업 집행의 문제점을 족집게처럼 찾아내 대안까지 제시하니 정부로선 죽을 맛이다.
가령 현 정부가 강력한 드라이브를 거는 감세 정책도 예외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단기적 세수 초과로 인한 감세는 재정수지 악화를 초래해 왔다" "종합부동산세 완화 등의 감세로 지방재정이 크게 줄어들지만 재원 보전 대책이 없다" 등 날선 비판이 잇따라 보고서로 나왔다.
예산정책처는 내년도 경제성장률을 정부 전망치 5% 내외보다 낮은 3.7%로 예측하기도 했다. 이는 후일 정부가 경제성장률 전망을 1% 포인트 가량 낮춰 수정예산안을 제출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보고서와 자료들을 각 상임위에서 의원들이 그대로 인용, 정부 비판의 잣대로 사용하면서 예산정책처가 힘 있는 기관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출범 5년째인 예산정책처가 원래 이랬던 것은 아니다. 초대 최광 처장은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냈다가 여권의 압력으로 결국 밀려나야 했다. 이후 예산정책처는 한동안 술에 물 탄 듯한 힘 빠진 보고서를 내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의회주의자로 알려진 김형오 의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변했다. 새 국회 지도부가 외압을 막고 조직 확장도 적극 검토하는 등 힘을 실어주자 대정부 비판에 있어서 점차 자신감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예산정책처는 현재 공식적으로 약칭을 '예정처' 대신 '예산처'로 사용하고 있다. 정부조직 개편에서 기획예산처가 기획재정부로 바뀌면서 '예산'이 들어간 부처가 없어진 것이 표면적 이유이지만 경제 부처와 기 싸움의 성격이 짙다. 예산 편성 주도권을 둘러싼 국회와 행정부의 치열한 싸움은 이제 시작됐다.
김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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