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금'은 "(서열 따위에서) '으뜸' 또는 '첫째'의 바로 아래, 또는 그런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을 가리킨다. '으뜸'이 "(중요도로 본) 어떤 사물의 첫째나 기본"을 가리키므로, 버금은 둘째라는 뜻이다.
이 명사들은 제가끔 파생동사로 '으뜸가다'와 '버금가다'를 지녔다. '으뜸가다'는 "많은 사물들 가운데 첫째간다"는 뜻이고, '버금가다'는 "첫째의 다음 자리에 있다, 둘째간다"는 뜻이다.
"정동영씨는 지난번 대통령 선거 득표수에서 버금이었다", "지난 중간고사에선 혜린이 성적이 우리 반에서 버금이었다", "나약한 맏이 대신에 억센 버금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었다" 따위의 문장에서처럼, '버금'을 독립적 명사로 쓸 수도 있다. 그러나 '버금가다'라는 파생동사의 어근으로 쓰는 경우가 훨씬 더 잦다. 예컨대 "오사카는 도쿄에 버금가는 도시다"에서처럼.
첫째에 크게 뒤지지 않는 '넘버 투'
버금'은 '넘버 투'다. 그러나 그 지위나 중요도에서 '넘버 원'에 크게 뒤지지 않는 '넘버 투'라는 뉘앙스를 지녔다. 그러니, "아시아에서 한국은 일본에 버금가는 경제강국이다"라는 말은 우스꽝스럽다.
설령 한국이 일본에 이어 '넘버 투'라고 하더라도, 그 경제력의 차이가 워낙 커서 '버금'이라는 말을 쓰기 민망한 것이다. 어떤 고등학교 수학 시험에서 최고 득점자 혜린의 점수가 92점인데 차위 득점자 채린의 점수가 42점일 때, "채린의 수학 점수는 혜린의 점수에 버금가!"라고 말하는 게 어색한 것과 같다.
프랑스 좌우동거 내각에서 총리의 권한은 대통령의 권한에 버금간다" 같은 문장에서라야, '버금가다'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프랑스는 이원집정부제를 취하고 있어서, 총리가 대통령과 소속 정당이 다를 경우에 총리의 힘은 말 그대로 대통령에 버금간다.
어떤 영역에서는 다수당 출신 총리가 직선 대통령 이상의 힘을 갖기도 한다. "인도 인구는 중국에 버금가"라는 표현도 자연스럽다. 제가끔 10억을 훨씬 웃도는 이 두 나라의 인구는 다른 나라들의 인구와 아예 비교 대상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버금가다'라는 표현을 제외하면, 일상어에서 '버금'이라는 말은 자주 쓰지 않는다. 중학교 음악시간에 들은 버금가온음, 버금딸림음, 버금딸림조, 버금딸림화음, 버금삼화음, 버금청(알토), 버금막청(메조소프라노) 따위의 표현에서 말고는 '버금'이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없다.
사실 이 음악용어들도 한자어 용어를 우리고유어로 바꾸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만들어낸 말이어서 생경함을 간직하고 있다. 아, '으뜸상' '버금상'이라는 말도 가끔 들을 수 있다. 최우수상이나 우수상, 1등상이나 2등상에 해당할 말을 이리 고친 이들은 분명히 언어민족주의자들일 것이다.
'버금'의 상대어라 할 '으뜸' 역시 '으뜸가다' 형태의 자동사로 많이 쓰지만, 언어민족주의자들의 애국심에 떠밀려 으뜨그림씨(보조용언의 도움을 받은 주[主]형용사), 으뜸글(주문[主文]), 으뜸꼴(기본형), 으뜸마디(주절[主節]), 으뜸셈씨(기수사[基數詞]), 으뜸삼화음 같은 합성어들의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버금'은 '둘째가다'라는 뜻의 중세어 동사 '벅다'에서 온 명사다. 한자로는 次(차), 副(부), 貳(이) 따위에 대응했다. 둘째아들(次子)를 가리키는 '버금아들'이라는 말도 있었고, 관형형으로 바꾼 '버근'을 앞에 놓은 '버근부인(夫人)'은 첩을 가리켰다. '버근부인'의 예에서 보듯, '벅다'는 중세어에서 '바르지 않다(不正)'의 뉘앙스를 지니기도 했다. '벅다'에서 파생한 부사 '버거'는 '다음으로'라는 뜻이었다.
독자들도 잘 알다시피 한국어에는 수를 나타내는 낱말체계가 고유어와 한자어로 갈려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따위의 기수사와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따위의 서수사는 고유어고, 일, 이, 삼, 사, 오 따위의 기수사와 제일, 제이, 제삼, 제사, 제오 따위의 서수사는 한자어다.
'으뜸'과 '버금'만을 놓고 보면 혹시 제3의 수사체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긴 하지만, 그 증거는 없다. 불현듯, '최우수상' '우수상'을 '으뜸상' '버금상'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그 다음 순위의 상은 뭐라 부를지 궁금하다.
한국어 수사체계가 둘로 나뉘어 있는 것은, 그리고 그 두 종류 수사의 쓰임새에 일정한 규칙이 없는 것은, 한국어를 익히려는 외국인들에게 악몽이다.
왜 "기차는 저녁 팔 시 마흔 분에 떠나"라고 말하면 안 되고 "기차는 저녁 여덟 시 사십 분에 떠나"라고 말해야 하는지를, 그런데 왜 또 군대에서는 '저녁 여덟시 사십분'이 '이십시 사십분'으로 변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긴 어렵다. 왜 '쉰 원짜리 동전'이나 '여덟 초(秒) 동안의 키스'는 그른 표현이고, '오십 원짜리 동전'이나 '팔 초 동안의 키스'는 옳은 표현인지를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그저 "그게 관행이야, 외워!"라?말할 수밖에.
사랑은 자기보존 욕망까지 압도해
사랑은, 특히 열애나 순애는, 그 주체와 객체의 으뜸감과 버금감을 뒤바꾸는 행위다. 사랑이라는 열병은 그 주체의 자기보존 욕망, 자기확장 욕망을 더러 압도한다. 고금동서의 많은 연애서사는 연인을 살리기 위해 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는, 심지어 목숨을 내던지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이것은 유전자의 자기보존과 확장 욕망에 어긋나는 행위다. 아니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어버이들은 이해할 수도 있다. 그것이 유전자를 더 널리 퍼뜨리기 위한 전략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부모에게 제 장기를 이식해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는 자식의 행위를 '효[孝]'라는 이름으로 북돋우는 여론이 도착적임을 지적해야겠다. 순전히 생물학적 관점으로만 보면, 부모는 아이들을 낳아 키움으로써 제 임무를 다한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공유하는 유전자에게 절실히 필요한 '운반체'는 늙은 부모의 몸이 아니라 젊거나 어린 자식의 몸이다. 그러니 부모가 자식에게 제 장기 하나를 떼어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럽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제 장기를 떼어주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이것은 내가 복거일씨의 어느 글에서 배운 관점이다. 그러나 문화의 핵심부분은 반(反)생물학이다. 그래서 부모를 위해 희생하는 자식을 찬양하는 풍속도 이해할 만은 하다.)
그러나 연애서사 속의 인물들은 자신과 피를 나누지 않은 연인을 위해 더러 목숨을 바친다. 으뜸의 자리를 연인에게 주고, 제게는 버금의 자리를 남긴다. 한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개인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열정에 빠진 한 개인은, 같은 종(種)에 속한 이성(때로는 동성)이라는 것말고는 자신과 아무런 생물학적 실로 연결돼 있지 않은 타인을 자신보다 더 중요시한다.
제 유전자의 확산과 무관한 경우에도 이런 자기희생을 볼 수 있다. 그 점에서 사랑은 정신의 질병이랄 수도 있다. 제 유전자의 확산과 무관한 경우에도 제 짝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생물체가 이 행성 위에 사람말고도 있을까? 없을 것 같다. 순전한 사랑은 그 주체끼리 으뜸의 자리와 버금의 자리를 맞바꾸는 행위다. 또는 최소한, 자기 다음의 자리, 즉 버금 자리에 한 타인을 세우는 행위다.
2인 공동의 배타적 이기주의
주례라는 걸 서 본 일이 두 차례 있다. 두 커플 다 그 전부터 친숙했던 젊은이들이 아니라, 주례를 섬으로써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두 번 다 흔쾌히 동의할 수가 없었다.
거듭된 청에 떠밀려 서게 된 자리다. 어차피 서게 될 바에야 처음 청을 받았을 때 선뜻 수락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내가 그 젊은이들의 청을 여러 차례 거절한 것은, 내 결혼 생활이 그리 모범적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내 발밑이 불안한 처지에, 결혼 생활을 시작할 남녀에게 무슨 조언을 하랴? 앞으로 내가 다시 그 어색한 자리에 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세 해쯤 전, 신부와 신랑 모두 나와 가까웠던 커플의 주례 요청을 사양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요청을 사양하며, 나는 이리 말했다.
"늬들 주례를 안 서야 앞으로 내가 주례를 안 설 수 있어. 이제 누가 아무리 되풀이 청해도, 늬들 얘기하면서 거절할 거야. 가장 가까운 이들의 주례를 거절했는데,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주례를 서겠느냐고." 실제로 그 뒤 몇 차례 받은 주례 요청을 나는 그 젊은이들을 방패막이로 삼아 사양했다.
그 전에 두 차례 주례를 서며 나는 신부 신랑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늘 같은 편이 돼라. 세상 모든 사람이 네 배우자에게 등을 돌려도 너만은 배우자 편이 돼라. 자기보다 상대방을 더 위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자기 다음 자리에는 상대방을 두어라. 두 사람이 서로에게 세상의 으뜸이 되는 것, 상대에게 으뜸 자리를 내주고 스스로 버금으로 내려앉는 것, 2인 공동의 배타적 이기주의, 그게 내가 생각하는 연애고 사랑이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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