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작은딸 내외와 함께 김장을 했습니다. 작은 딸은 원래 자기 시댁에 가서 김장을 해왔는데 이번엔 시어머님이 편찮으시다며 저희 집에서 김장을 해가겠다고 해서 같이 하게 되었지요.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 딸과 함께 배추를 다듬고 절이고 속을 넣고 하는 일까지 다 마쳤습니다. 그런데 딸아이가 갖고 온 김치통이 굉장히 많더라구요.
"너희 집은 식구도 없는데 왜 그렇게 김치가 많이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딸아이 말이 "우리 어머님이 아프셔서 내가 김장을 해드려야 돼서…, 그래서 어머니께 드릴 김치통까지 가져온 거에요"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뭐 다른 것도 아니고 시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김장을 못하게 됐으니까 김장김치 몇 포기 갖다 드린다는데 저도 뭐라고 하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딸아이가 가져온 김치통에 사돈댁의 김치까지 담아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상보다 김치가 많이 들어가서 정작 저희 냉장고의 김치통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지만요.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문제는 그 후였습니다. 김장을 끝낸 뒤 늦은 점심을 먹고는 잘 익은 홍시를 꺼내 손녀딸과 사위에게 건넸습니다. 원래 홍시를 잘 먹지 않는 딸에게는 권하지도 않았지요. 그런데 딸이 "엄마 그 홍시 맛있게 생겼다. 또 있어요?"라고 묻더군요.
그 홍시는 옆집에서 몇 개 얻어온 것이었습니다. "저기 몇 개 남았는데 왜? 너 예전에 감은 싫다고 하지 않았냐?"라고 물으니 "응, 맞아요. 난 감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홍시 엄청 좋아하세요. 엄마, 그리고 아까 그 고들빼기 김치 맛있던데 조금만 싸주세요. 우리 어머니가 요즘 통 입맛이 없으시대요"라는 게 아니겠어요?
아니, 저도 요즘 밥맛이 없이 밥 먹는 것이 돌을 씹는 것 같은데, 제 엄마 생각은 안중에도 없이 시어머니 입맛만 챙기는 딸이 얼마나 얄밉던지요. 사위가 있는지라 차마 뭐라고 말은 하지 못하고 몇 개 남은 홍시와 아껴두었던 고들빼기 김치까지 긁어서 딸아이에게 싸 주었습니다. 뭐 이런 일이 처음도 나이고 '딸 키워봐야 전부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이라고 주위에서 듣긴 했지만 그 흔한 홍시까지 걷어가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어이가 없더군요.
딸아이는 아들만 셋 있는 집의 막내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난히 안사돈은 저희 딸을 그렇게 예뻐하고 제 딸도 시어머니께 그렇게 잘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딸아이 말로는 얼마 전 바깥사돈이 돌아가신 이후로 부쩍 저희 딸네 집에 자주 오신다고 합니다. 아들만 키우셔서 그런지 가끔씩 저희 딸에게 "아이고, 딸 하나만 낳을걸. 너 같은 딸 있으면 좋을 텐데…" 라고 하시면서 부쩍 외로움을 타시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저도 여자지만 엄마에게는 딸이 꼭 있어야 하거든요. 며느리들 흉도 보고 아들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비밀들을 딸과는 함께 나눌 수가 있거든요. 아들만 셋인 안 사돈도 바깥 사돈이 돌아가신 뒤 많이 적적해 하시고 말벗도 사라지자 아마 딸처럼 친구처럼 지낼 누군가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큰며느리와 둘째 며느리도 있지만 유독 저희 딸에게만 "네가 내 딸이었으면 좋겠다" 하면서 잘해주신다고 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딸아이 집에 다니러 오셔서는 청소도 해 놓으시고 또 놀이방에 있는 손녀도 받아 주신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넌 시어머니랑 같이 살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며칠씩 있다 가시면 불편하지 않냐?"라고 슬쩍 떠 보았더니 딸아이 또한 그런 시어머니가 싫지않다고 합니다. 청소도 해 주시고 반찬도 만들어 주시고 애도 봐 주시니 좋기만 하다고 하네요.
안사돈은 아마도 결혼하고도 계속해서 발 동동거리며 직장생활 하는 며느리가 안돼보이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정이 많이 가는 모양이더라구요. 그렇게 딸아이와 시어머니는 늘 서로 챙겨주고 싶은 모양입니다. 고부간의 갈등 없이 잘 지내는 건 좋은데 꼭 친정엄마 앞에서 너무 표시를 내가며 제 시어머니를 챙기는 딸이 얄미운 것은 어쩔 수가 없더라구요.
언젠가부터 딸아이는 친정에 오면 두 눈에 불을 켜고 시어머니께 갖다 드릴 것들을 찾곤 합니다.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제가 딸 내외 온다고 만들어 놓은 밑반찬은 기본이고 제가 아끼고 잘 입지 않던 스웨터도 자기 시어머니와 잘 어울리겠다며 달라고 야단입니다. "엄마는 내가 나중에 더 좋은 것 사다 줄께. 엄마는 아직 젊어서 이런 스웨터 색이 잘 안 어울려"라면서 제 큰딸이 사다 준 스웨터를 잽싸게 쇼핑백에 담아 갑니다. 게다가 갓김치나 고들빼기 김치처럼 귀해서 아껴 먹는 밑반찬들도 여지없이 쓸어 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전에는 작은 딸 내외가 온다고 하면 아끼던 반찬들을 모두 꺼내 주고 갈비며 잡채도 해 놓았는데, 요즘은 그런 딸이 가끔 밉기도 해서 저도 모르게 아끼던 반찬들은 더 깊숙이 감춰 놓게 됩니다.
저희 딸은 물론 제게도 잘 합니다. 철이 바뀔 때마다 예쁜 옷도 사다 주고, 주말이면 저를 데리고 가서 제가 사는 동네의 백화점 구경도 시켜주고, 또 용돈도 주고….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제 앞에서 자기 시어머니를 더 챙기곤 하는 그런 딸이 얄미운 건 왜일까요? 말로는 "시어머니께 잘해라"하면서도 아마 저도 모르게 딸아이와 안사돈과의 사이를 질투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딸아이가 제 앞에서 시어머니 흉을 보거나 잘 지내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 또한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한 모양입니다. 제가 아끼는 반찬이며 좋아 보이는 옷가지들을 서슴없이 가져가는 딸아이가 얄밉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 고부갈등 없이 계속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부족한 제 딸을 예뻐해 주시는 안사돈께도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 MBC라디오 표준FM(수도권 95.9㎒) <여성시대> 에 소개된 사연을 매주 토요일 싣습니다. 여성시대>
충남 예산군 오가면-강석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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