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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희의 막전막후] 연극 '고곤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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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희의 막전막후] 연극 '고곤의 선물'

입력
2008.11.24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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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극단의 연극 '고곤의 선물'은 '에쿠우스' '요나답' '아마데우스' 등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극작가 피터 셰퍼의 1992년 발표작이다(2003년 같은 극단에 의해 초연된 바 있다).

추락사한 극작가 에드워드 담슨의 미망인 헬렌은 아버지의 전기를 쓰겠다고 방문한 의붓아들과 이틀에 걸쳐 남편과의 만남부터 불화, 작가로서의 절정기와 추락 과정을 재구성한다.

와중에 부부간 의존관계 속에 숨은 파괴적 욕망과 증오, 담슨의 인간됨과 죽음에 숨은 비밀 등을 털어놓는다. 헬렌은 남편의 뮤즈 역할을 해내면서, 괴물 고곤을 죽인 페르세우스와 수호여신 아데나와 자신들을 동일시하며 연극적 유희를 교환해 왔다.

진술과 재연 사이 헬렌의 만류로 세상에 미공개된 담슨 극의 폭력적인 장면들이 극중극으로 끼어든다. 초연 당시엔 희곡의 지시문대로 화강암 절벽을 무대 위에 세우고, 절벽이 갈라지면 신화와 역사 속 인물들이 등장하는 방식으로 공연되었다.

2008년 '고곤의 선물' 무대는 최소주의를 지향하면서 백색이 주를 이룬다. 바닥엔 하얀 대리석이 깔리고, 테라스를 가리고 있는 지중해의 접이식 덧문은 그리스비극의 배경이 되는 신전 입구만큼이나 높고 위용 있다.

빈 공간에는 담슨의 어두운 내면처럼 심연을 알 수 없는 바다 빛깔의 책상 하나가 존재감을 발한다. 극중 폭력성이 고조될 때 흰 문은 붉은 조명으로 물들고, 하얀 대리석 바닥은 선홍빛 포도주와 피로 얼룩지면서 매우 회화적인 미장센을 창조한다. 조명으로, 구획된 공간의 자연스러운 이동과 변용을 만들어내는 연출력이 세련되다.

이번 공연에서 원작과 눈에 띄게 다른 선택은 극중극 장면에서 등장하는 코러스를 연출한 방식이다. 연출가는 신화와 역사 속 등장 인물들이 가면 쓴 채 내리닫이 옷을 입고 나타나거나 갑옷 입고 창 드는 식의 ('담슨' 내면의) 고대 그리스적 상투성을 거부한다.

그는 이 장면들에서 모던발레와 마임을 절충한 듯 어떤 장식도 배제한 신체들의 스펙터클을 선보였다. 덕분에 담슨의 방종하고 상스러운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에서, 깔끔하고 고상한 헬렌의 머릿속을 엿본 듯한 아쉬움이 있다.

우리 관객에겐 서구 기독교 문명 속에서 되풀이되는 폭력과 보복의 테러리즘에 대한 깊은 죄의식이 낯설고, 영국과 아일랜드가 대치하는 상황 등 작가가 겨냥한 문제의식도 멀어 작품에 담긴 폭력에 대한 성찰이 다소 관념적으로 다가올 수는 있겠다.

그러나 아비를 향한 아들의 인정투쟁, 이기적인 남편에게 희생된 아내의 자기회복과 용서의 서사, 21세기 테러리즘의 세계화에 대한 극시인의 예언, 연극의 사회적 영향력의 위축에 대한 노작가의 만가(輓歌) 등 다층적인 읽기가 가능한 연극이다. 남육현 역, 구태환 연출. 23일까지 드라마센터.

극작ㆍ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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