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형씨, 우리 연극 같이 합시다."
2002년 국립극단 연수단원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한 주인영(30)씨는 그렇게 엉뚱한 전화 한 통을 건 게 계기가 돼 2003년 연출가 박근형(45)씨가 운영하는 '극단 골목길'의 단원이 됐다. 같이 연극계에 몸 담고 있으면 나이가 많든 적든 모두 동료라고 생각했던 철없는 시절이었다.
그리고 이 당돌함은 주씨의 무기이기도 했다. 골목길 입단 후 그는 '선착장에서'의 다방 여종업원, '맨드라미'의 하숙집 딸 주혜, '경숙이, 경숙아버지'에서는 전쟁통에 피란길에 오른 어린 딸 경숙이 등 개성 강한 연기를 선보이며 단숨에 대학로의 주목 받는 배우로 떠올랐다. 2006년엔 '경숙이, 경숙아버지'로 동아연극상 신인연기상과 히서연극상 '기대되는 연극인상'도 받았다.
그런 그였기에 25일부터 12월 31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되는 '깃븐 우리 절믄 날'(성기웅 작ㆍ연출)에서 고혹적이고 지적인 1930년대의 모던 걸을 연기한다는 소식에 선뜻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주씨 역시 예쁘장한 외모의 소유자이면서도 이번 역할이 내심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깃븐 우리 절믄 날'은 소설가 구보 박태원, 시인 이상, 그들의 친구 정인택, 그리고 카페 여급 권영희 사이의 연애 사건을 바탕으로 1930년대 경성의 모습과 젊은이들의 연애와 결혼의 문제를 다룬 작품. 연극에서 주씨는 이상의 두 번째 여인이자 삼각 또는 사각관계의 주인공인 권영희를 연기한다.
그는 "그동안은 왜 내 나이에 맞는 연애 얘기를 해 볼 기회는 오지 않을까,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면서도 "하지만 그간 해 온 평범하지 않은 캐릭터들이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어 이번 작품보다 연기하기에는 더 쉬웠던 것 같다"고 했다.
"권영희는 자신의 사랑에 확신을 못하고 이별 앞에서야 감정이 고조되는 현대 여성의 전형이죠. 마치 2008년의 주인영처럼요. 그래서 무의식 중에 제 생각이 대사에 반영될까 싶어 걱정스럽기도 해요."
'경숙이 경숙아버지'에서는 경상도 사투리, 지난 봄 한일합작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에서는 자연스러운 일본어 연기로 남다른 언어 감각을 선보였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서울의 옛말과 일본어를 구사한다.
그렇게 우연찮게 연이어 새로운 말을 익혀야 하는 작품과 인연을 맺었던 까닭에 그는 운명론을 믿는다고 했다. "포기가 빠르고 상처를 잘 받는 성격이어서 운명론이 아니었다면 연극 배우로 살아가기 힘들었을 지도 몰라요. 다행히 인복이 많은 덕분인지 큰 좌절 없이 배우 생활을 해 온 것 같네요."
그는 앞으로 재즈가수나 댄서 역할에도 도전하고 싶고, 뮤지컬이나 영화에도 출연해 보고 싶지만 극단 골목길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게 '시시한 역할은 없다'는 교훈이기에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옛날을 돌이키는 것은 쉽지만 앞을 내다보는 것은 어렵다'고 믿는 그에게 20대 여성 권영희 역이 30대인 지금 돌아온 것이 다행으로 여겨지듯.
그는 어떻게 배우의 길을 선택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부모님으로부터 자신이 서너 살 때부터 탤런트도 아닌 연극배우가 되겠다고 칭얼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다.
"전 제 인생의 행복을 위해 연극을 해요. 특별히 연극을 위해 사는 소명의식 같은 게 있는 것 같지는 않고. 하지만 사실 다른 일은 생각해보지 못했네요. 지금으로선 다른 걸 하면 죽을 것 같으니까." 공연 문의 (02)708-5001
김소연 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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