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바람이 제법 쌀쌀하던 이달 중순, 강원 춘천시 남산면의 가족 연수원 '트윈스빌'. 푸짐하게 차려진 저녁상에 아이들이 신이 났다.
고사리 손들이 알이 통통한 새우를 열심히 까더니, 노릇노릇 구워진 돼지고기 바비큐와 새우를 양 손에 든 채 "어서 와 먹으라"며 성화다. 제 배도 고프련만 정성스럽게 깐 새우를 선생님과 부모님 입 앞에 들이대는 모습이 대견하다.
결식아동지원사업인 '희망나눔학교'의 방과후교실에 다니는 아이들과 부모 22명이 한국씨티은행(한미노동조합)이 후원하고 굿네이버스가 주최한 '우리가족 희망여행'에 참석했다. 가을 단풍 만큼 아이들의 마음이 희망과 사랑으로 곱게 물든 하루였다.
김순옥(58)씨도 두 손주, 명수(10ㆍ가명)와 명진(9ㆍ가명)이를 데리고 참가했다. 김씨가 두 아이를 맡은 지는 올해로 7년째. 김씨는 5년 전, 2,000만원짜리 전세방에서 딸 내외와 함께 지내다 사위의 노름빚으로 집이 넘어가는 바람에 손주를 데리고 나왔다. 딸 내외는 종적을 감췄다.
김씨는 "6년을 처가살이 하더니 노름으로 집을 넘기질 않나, 금쪽 같은 딸에게 손찌검을 하질 않나. 세상에서 가장 잘해야 할 아내를 때리고, 두 번째로 잘해야 할 자식을 버리고, 부모 돈까지 뜯어간 놈"이라며 사위에 대한 울분을 토하다 그만 물기어린 눈을 꼭 감았다.
어쩔 수 없이 맡은 손주들과 몸을 누일 방 한 칸 없이 막막했던 김씨에게 세탁소를 운영하는 친구가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애들 할아버지는 친척집에, 그리고 나는 애들이랑 세탁소 쪽방에서 살게 됐어요. 세탁소도 불안정하죠. 방 빼라고 하면 친구라도 어쩔 수 없고…." 김씨는 허리디스크와 고지혈증 등을 오랫동안 앓아 돈벌이가 힘들다. 생활비는 정부에서 두 아이에게 주는 보조금에 의지한다.
"제 자식을 제 손으로 호적을 팠어요. 동사무소 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지만 어떡합니까. 부모가 있으면 실제 키우지 않더라도 정부보조금이 안 나오니까. 그것마저 끊기면 애들을 어떻게 키우나 싶어 제 손으로 딸을 호적에서 파내고 아이들을 제 밑으로 데려왔어요. 그랬더니 영세민으로 분류돼서 아이들이 정부에서 20만원 지원을 받게 됐지요."
김씨와 손주의 한 달 생활비는 정부보조금 20만원과 할아버지가 파지를 주워 모은 10만원 가량이 전부다. 그래도 김씨는 그 중 20만원을 고스란히 손주들의 교육비로 지출한다. 손주들이 교육을 못 받아 가난이 대물림 되는 것이 두려워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료 급식을 통해 식사를 해결하지만, 정작 본인은 하루 한 끼만 먹는다.
"먹고 사는 건 좀 덜 먹고 헌 옷을 입히면서 살아가면 되지만, 아이들 교육은 어떡해야 할지 난감하다. 내 눈이라도 잘 보이면 좋으련만…."
김씨의 가장 큰 고민은 두 아이의 교육 문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만 해도 반에서 1,2등을 다투던 명수가 3학년 들어 반 친구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하면서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속이 탄 김씨가 학교를 찾아가고 태권도 학원에도 보냈지만, 명수는 갈수록 내성적으로 변했다.
"원래 공부도 곧잘 하던 아이가… 다 내 탓인 거 같고, 레고 조립이랑 프라모델을 좋아하는 데 그거 한 세트 못 사줘 가슴이 아파요." 한 번은 명수가 6개월이 넘도록 모은 2만7,000원을 들고 김씨에게 레고를 사 달라고 졸랐다. 김씨는 "할미가 돈을 많이 벌면 레고 사줄게. 언제인지는 몰라. 하지만 꼭 사줄게"라며 명수를 꼭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김씨에게 아이들 교육 문제에 대한 희망의 가닥이 보인 것은 2007년, 두 아이가 굿네이버스에서 진행하는 방과후교실, 방학교실에 참가하면서부터. 방과후교실에서 진행되는 문화체험과 영어교실, 그리고 개별학습 등에 참여하면서 두 아이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명진이는 방과후교실에서 미뤘던 숙제를 꼬박꼬박 하게 됐고, 알파벳 철자 하나 모르던 명수도 조금씩 영어 단어를 읽어냈다.
무엇보다 값진 수확은 또래들과의 만남이다.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들이 방과 후에도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어두웠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방학 때는 '방학교실'에 참여, 또래들과 영화도 보고, 동물원도 가고, 여행도 함께 떠난다. 이렇게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다른 사람들을 기피하던 행동도 부쩍 줄어들었다.
2007년 방과후학교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자기방어적이고 낯가림이 심했던 명진이는 요즘 마음 속 얘기를 선생님들에게 스스럼없이 터놓는가 하면, 자기 표현도 다양해졌다.
김씨는 "춘천에 나와 산에 알록달록 물든 단풍을 보니 아이들 마음에 칙칙했던 회색빛이 걷어지고 노란 단풍잎처럼 단풍이 든 것 같다"며 "이참에 기차도 태워斂?싶다"고 감회를 밝혔다.
김씨가 "스트레스 풀렸니, 명수야"라고 따뜻하게 묻자, 명수는 힘차게 "응, 다 풀렸어. 할머니랑 자주 왔으면 좋겠어"라며 해맑게 웃었다.
■ 한국씨티은행의 결식아동 돕기
"엄마랑 좋은 대화하게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엄마, 늘 좋은 말 많이 하도록 함께 노력해요." "내 마음을 거울에 비추는 것 같아 마음이 찡했어요."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랑 더 가까워지고 친해진 것 같아요."
한국씨티은행(한미노동조합)이 후원하는 '우리가족 희망여행'에 참석한 아이들이 '마음 드라마'라는 심리 치료 프로그램을 경험한 뒤 느낀 소감을 적은 글들이다. 엄마와 아이들이 서로 역할을 바꿔 갈등 상황을 재연하면서 조금씩 서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감싸 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우리가족 희망여행'은 한국씨티은행(한미노동조합) 조합원들이 2006년부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문화 실천을 위해 '연봉의 1% 사회기부운동'의 하나로 진행하는 결식아동지원사업 '희망나눔학교' 활동의 하나다.
한국씨티은행은 2006년 2학기부터 결식아동지원사업에 8,000만원씩 총 12회 후원을 약정하고 지금까지 9회에 걸쳐 7억2,000만원의 기금을 국제구호단체 굿네이버스에 전달했다.
굿네이버스는 이 기금으로 학기 중 전국 52만명의 아이들에게 점심식사를 지원하고 있다. 또 방과후 교실과 방학교실을 운영하며 아이들의 영양은 물론, 정서적 지원과 전문적인 상담 등 종합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희망나눔학교는 내년 2월 중학교에 진학하는 저소득층 아동을 대상으로 3,000만원 가량의 교복을 지원할 예정이다.
굿네이버스 윤보애 간사는 "희망나눔학교를 통해 사회적 혜택이 부족한 소외지역 아이들에게 급식 제공은 물론, 정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학습지도와 문화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며 "앞으로 기업들의 사회공헌 활동이 더욱 활성화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후원문의 굿네이버스 (02) 6717-4000 www.nanum1004.org
춘천=강지원 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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