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N고 A교사는 최근 교장과 면담한 뒤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 자리에서 교장은 학교가 채택한 "금성출판사의 한국근ㆍ현대사 교과서를 바꾸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동의하지 않으면) 근무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책임지기 어렵다"는 말도 덧붙였다. 다른 역사 담당 교사 3명도 차례로 불려가 똑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부산 B고는 내년도 한국근ㆍ현대사 교과서 주문을 아예 취소했다. "역사 교과서 문제로 시끄러우니 휘말리지 않도록 하라"는 교감의 부탁을 듣고 교사들이 회의 끝에 교과서 없이 자체 교재로 수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학교의 교재 역시 금성출판사의 것이었다.
'좌편향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갈등이 전국의 학교 현장으로 옮겨지고 있다. 지난달 30일 교육과학기술부의 역사교과서 수정 권고안이 발표된 이후 특정 교과서에 대한 재선정 압력이 표면화하는 분위기다. 이런 흐름은 최근 서울과 부산, 울산 등 학교장과 학교운영위원을 대상으로 교과서 연수를 실시한 시도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서울시교육청이 최근 한국근ㆍ현대사 과목이 개설된 서울지역 240여개 고교에 공문을 보내 내달 2일까지 교과서 재선정을 위한 학운위 소집 여부, 수정 주문 실시 결과 등을 보고토록 하면서 갈등이 커지고 있다.
서울 K고는 17일 역사교과협의회에서 교과서 변경 의사가 없다는 의견을 냈지만 학교장이 이 문제를 내달 3일 열리는 학교운영위원회에 안건으로 상정키로 결정했다. W고는 교사들이 반발해 일단 재선정 논의는 없던 것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다.
이 학교 이모 교사는 "교장이 회의에서 연수 내용을 언급하며 교과서 재선정에 대한 얘기를 꺼냈지만 교사들이 교과서 주문도 끝난 상황에서 굳이 변경할 이유가 없다고 하자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부산은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부산시교육청이 14일 금성출판사의 한국근ㆍ현대사 교과서를 쓰고 있는 49개 고교 교장만 따로 불러 교과서 변경을 주문한 이후 대부분 학교에서 재선정을 놓고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S여고는 교장이 연수 직후 재선정 평가표를 만들어 학운위 심의자료로 제출하라고 요구했지만, 교사들이 거부 의사를 밝힌 상태다. D고 교장은 "금성출판사의 교과서는 추천해도 선정이 힘들 것" 이라며 역사교과 교사 4명에게 24일까지 3개 교과서를 추천해 학운위에 올릴 것을 지시했다.
이 때문에 근ㆍ현대사 과목을 아예 수업 편성에서 빼거나 바꾼 학교도 있다. G고는 내년부터 선택과목을 세계사로 변경하기로 했으며, H고는 근ㆍ현대사를 제외하고 국사 과목만 가르치기로 했다.
N고 최모 교사는 "공립학교의 경우 교장이 '나도 명령을 받는 공무원이라 어쩔 수 없다'며 사실상 재선정을 강요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장들도 인사권을 쥐고 있는 시교육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교단 분열 양상도 뚜렷하다. 울산 W여고는 교사들이 재선정 거부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기가 어렵다. 역사 교사 5명 중 3명이 승진 등이 달려있는 부장 교사인 터라 학교의 요구를 마냥 외면하기 어려운 탓이다.
운신의 폭이 적은 기간제 교사도 상황은 비슷하다. 최모 교사는 "교장이 다른 학교 핑계를 대거나 재계약을 들먹이며 '쉽게 가자'고 말하면 울며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다"며 "이해관계나 처한 입장이 서로 다르다 보니 교사들간 불협화음도 심각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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