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2분.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서거했다. 궁정동 안가 깊숙한 곳에서 졸지에 발생했지만 가장 먼저 실상을 파악하고 신속하게 상황을 장악한 곳은 국군보안사령부였다.
사건을 일으킨 중앙정보부도 아니었고, 바로 옆 별관에서 직접 총성을 듣고 김 부장으로부터 상황 설명까지 들었던 정승화 참모총장 휘하 육군본부도 아니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일과를 끝내고 사복 차림으로 부인과 함께 '한가한 나들이'에 나섰던 상황에서도 사건 발생 40분 남짓한 시간에 완전히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전 소장은 3곳으로부터 정보를 받았다. 하나는 청와대 경호실 5과장이던 동생 전경환씨의 다급한 전화. '심각한 사태 발생'의 신호였다. 다음은 보안사 1처장 정도영 대령의 급보.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이 피투성이의 인물을 업고 국군서울지구병원(보안사와 동일 건물)에 뛰어왔다는 것이다. 실장이 업었다면 대통령과 경호실장(차지철) 정도인데, 김 실장은 차 실장을 업고 뛸 체력이 아니다. 본부에 돌아온 전 소장에게 병원장이 "VIP"라고 귀띔한 것이 마지막. 보안사는 일찌감치 비상태세에 들어갔다(이상 한국일보 발행 <실록 궁정동 총소리> 에서). 실록>
■당시의 보안사는 그런 곳이었다.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부터 정치군인의 대명사 격이었던 보안사령관엔 이례적으로 9명 중 8명이 대장으로 보직을 맡았다. 5공 군사정권의 산실로 군 내에서 막강한 파워를 휘둘렀음은 물론, 10ㆍ26 이듬해 국가안전기획부로 탈바꿈한 옛 중앙정보부의 역할까지 흡수해갔다. 1990년 민간인 사찰사실이 폭로되면서 '옛 중정의 역할'은 금지됐고, 이듬해 국군기무사로 개편되면서 사령관 계급도 낮아지고 '본연의 업무'로 돌아갔다. 최근 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린 여간첩 원정화를 적발한 곳은 보안사가 아닌 기무사였다.
■기무사가 '소격동 시대'를 마감하고 경기 과천시 새 청사로 이전한다. 경복궁 동쪽 종로구 소격동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복을 주고 병을 고쳐달라고 하늘에 제사 지내던 소격서(昭格署)가 있던 곳. 1971년 보안사가 자리잡은 후 '터 값을 한다'는 속설도 있었다. 기무사가 있던 자리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바뀐다고 한다. 경복궁, 삼청공원, 시립정독도서관, 북촌마을, 인사동 등과 어울려 훌륭한 문화벨트가 될 것이다. 속설을 믿을 바는 아니지만 '문화의 파워'라면 '터 값'도 제대로 할 것 같다. 기무사 역시 '과천의 분위기'에 맞춰가니 일석이조다.
정병진 논설위원 bjjung@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