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자동차 업계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글로벌 경기침체로 소비자들이 자동차 구입을 미루면서 미국과 유럽, 일본의 자동차 판매가 격감하고 재고가 쌓이고 있다. 감산, 구조조정 같은 고전적인 방법으로는 글로벌 경기침체의 거친 파도를 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자동차 업계에 닥친 현실과 전망, 각국 정부의 움직임을 짚어본다.
■ 미국
미국 자동차 업계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빅3'는 정부의 구제금융에 생명줄을 맡긴 채 고사직전의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고, 자동차 부품업체들까지 "우리도 도와달라"며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미국 자동차 산업이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양상이다. 미 최대 자동차업체인 GM과 크라이슬러는 19일 시작되는 로스앤젤레스 모터쇼에 신차 출시를 포기했으며, 기자회견도 갖지 않기로 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17일 보도했다.
미 자동차 산업에 고용된 인력은 빅3에 24만명, 부품업체 230만명으로 미국 전체의 2%를 차지한다. 연관업체까지 포함하면 5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빅3가 몰락하면 1년 내 300만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하지만 위기 타개책은 요원하다.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는 7,000억달러 정부 구제금융의 일부를 빅3에 전용, 미국의 중추산업을 살려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임기말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오바마 당선자의 지원 요구에 대해 "확고하게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도 18일 하원 금융위원회에 출석해 "금융위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이기 때문에 7,000억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자금을 자동차 등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전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바이런 도건 민주당 상원의원은 "자동차 지원 문제는 하나의 산업이나 업체 몇 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라며 "50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미래의 문제"라고 절박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공화당의 리처드 셸비 상원의원은 "업체들은 매일 망하고 다른 업체들이 빈 자리를 메우기 마련"이라며 자금지원은 몰락을 일시적으로 늦출 뿐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데이너 페리노 백악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자동차업계가 망하는 것은 원치 않지만 구제금융안에서 지원하는 것에는 반대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민주당은 정부의 자동차산업 지원이 갖는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실물경제에 미칠 엄청난 여파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인 반면, 공화당은 정부지원이 자동차업계의 경쟁력을 되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상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은 구제금융 자금전용 법안을 이르면 19일 표결에 붙일 계획이다. 그러나 법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민주당 전원의 찬성에다 최소한 공화당 의원 12명의 지지를 끌어내야 하는 상황인데 현재 찬성입장을 보이고 있는 공화당 의원 3명에 불과해 통과가 극히 불투명하다.
이 와중에 자동차 부품업체들까지 지원을 요구하고 나서 문제를 가중시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들이 빅3 전용 법안에 자신들에 대한 지원이 빠지자 100여 업체의 서명을 받아 지원을 요청하는 서안을 의회에 보냈다고 전했다.
자동차 지원에 대한 언론과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블룸버그 통신은 "한국 사람들이 미국 자동차를 사지 않는 것은 관세 때문이 아니라 연료 효율이 엉망이고 업체가 혁신을 게을리 한 때문"이라며 자성론을 제기했다.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빅3 모델은 금융위기 이전 이미 고장난 상태였다"며 "이들은 부도가 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고 혹평했다.
오바마 당선자는 16일 당선 후 처음으로 CBS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동차 산업이 완전히 무너지게 내버려 두는 것은 경제전반에 미치는 파문 때문에 재앙이 될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자동차 지원이 백지수표를 주는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정부가 개입해 자동차 업체를 지원하는데 대한 형평성, 도덕성 논란을 의식한 발언이다. 바니 프랭크 하원 금융위원장도 주식 담보, 배당금과 경영진 보너스 지급 중지 등 구조조정을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미자동차노조(UAW)는 이런 구조조정마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어서 자동차 지원 문제는 정치권과 업계 전방위로 갈등이 파급되고 있다.
워싱턴=황유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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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유럽의 자동차 업계도 정부 지원 없이는 생존이 어려울 정도로 극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 등 외신은 유럽자동차제조협회(ACEA)의 발표를 인용해 유럽 지역의 10월 자동차 판매대수가 전달 대비 14.5% 감소한 11억 3,400만대를 기록, 6개월 연속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국가별로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 26개국이 감소세를 보였으며 유일하게 오스트리아가 소폭 증가했다. 아일랜드와 스페인은 54.6%나 감소했다. 이 지역의 올해 전체 자동차 판매대수도 전년 대비 5.4% 감소했다.
자동차 판매량이 감소한 것은 글로벌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았기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최근 유럽 지역이 경기 침체기에 진입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자동차 판매 감소로 벼랑에 내몰린 자동차 업계는 감산과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으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유럽 자동차 업계를 대표하는 르노와 PSA푸조는 4분기 자동차 생산을 각각 25%, 30% 줄일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양사는 이미 120만대의 재고 차량을 갖고 있어 재고를 소진하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GM의 유럽 자회사인 오펠, 다임러, BMW는 조업 단축과 한시적 공장 폐쇄를 발표했다.
자동차 업계가 위기에 빠지자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지만 여타 산업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아 실행 여부는 불투명하다.
노키아, 지멘스, SAP 등 유럽의 대표적 46개 기업 최고경영자(CEO)는 17일 "정부가 정치적 상징성이 뛰어난 자동차 산업에 초점을 맞춘 구제 정책을 실시하는 것에 반대한다"며 "모든 산업 부문의 상황이 나빠지고 있는 만큼 종합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는 유럽의 자동차제조거래협회(SMMT)의 폴 에버핏 회장이 "유럽 각국의 정부가 은행 지원을 위해 마련한 것과 유사한 조치를 자동차 업계에도 취하기를 요청하는 편지를 발송할 것"이라고 밝힌 직후에 나왔다.
이에 따라 유럽 각국 정부는 자동차 업계 지원을 해야 할 것인지를 저울질을 하고 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이날 유동성 위기에 빠진 GM 오펠의 경영진으로부터 지원을 요청받았으나 "지원 여부를 성탄절 이전까지 결정하겠다"며 확답을 피했다. AP통신은 "자동차 산업에 고용된 인력이 워낙 큰 만큼 각국 정부가 자동차 업계 지원에 나설 것"이라면서도 "자동차 업체에 구조조정, 연비 효율 개선, 기술 개발 등의 조건을 요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민주기자 m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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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금융위기에 따른 전세계 소비 위축에다 엔고(高) 영향으로 일본 자동차 업계도 실적 악화에 감산이 잇따르고 있다. 주요 자동차 10개사 중 올해 반기 결산에서 8개 회사의 영업이익이 감소했다. 지금까지 발표한 감산 규모만 국내외 전체 170만대를 넘는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10년 동안 판매량 증가일로였던 도요타자동차는 주력인 미국 시장에서 올해 신차 판매가 지난해보다 200만대 이상 줄어들 전망이다. 10월에는 영업일당 판매대수가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34.5% 줄어 25년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반기 영업이익도 지난해에 비해 54.2% 감소한 5,800억엔에 머물렀다. 공식 발표한 감산 대수가 5월에만 벌써 95만대다.
혼다와 닛산(日産)자동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올해 반기 영업이익이 지난해에 비해 각각 27.1%(3,700억엔), 47.8%(1,916억엔) 줄어든 두 회사는 혼다가 북미와 영국에서 7만대, 닛산이 유럽과 일본 국내에서 모두 20만대 이상 감산을 계획하고 있다.
판매 부진과 감산 결정은 고유가의 타격까지 겹쳤던 대형차에서 시작해 서서히 소형차로 파급되고 있다. 자동차 할부판매회사 심사가 엄격해지면서 미국, 유럽에 이어 중국, 인도 등 증가일로던 신흥공업국에서도 소비 위축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엔고의 영향도 심각하다. 엔화 가치가 1엔 상승할 경우 400억엔의 피해를 보는 것으로 추산되는 도요타의 경우 반기 영업이익에서 엔화 손실이 3,000억엔에 이른 것으로 분석됐다. 혼다도 엔화 상승으로 1,284억엔, 닛산은 989억엔의 손해를 본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일본 주요 자동차 회사들은 올해 전체 영업이익이 지난해보다 14~73% 감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반기 결산에서 유일하게 수익이 늘어난 경차 판매 일본 1위 다이하쓰공업 역시 불황을 우려해 소형차조차 팔리지 않게 되면 경차 판매도 줄어들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생산 감소에 따른 감원 바람이 가장 먼저 불어 닥친 곳도 자동차 업계다. 도요타가 이미 계약사원 2,000명 감원 계획을 발표했고, 닛산은 국내 비정규직 1,000명과 북미와 유럽 정사원 2,500명을 줄이기로 했다. 마쓰다, 스즈키도 700명 안팎의 비정규직을 감원한다.
시가 도시유키(志賀俊之) 닛산자동차 대표는 6일 반기 결산 발표 때 "어렵다는 형용사가 너무 점잖게 들리는" 상황이라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의 경제전문가들은 이 같은 성장 부진이 최소 2년 정도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도쿄=김범수 특파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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