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광화문 권역에서 임진왜란(1592~1598)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지 2곳과, 경복궁 창건 당시인 조선 태조 때의 경복궁 궁장(宮牆ㆍ궁궐을 둘러싼 성벽) 기초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조선 전기 경복궁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광화문에서 흥례문 사이 일부 구간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8일 발굴 현장을 공개하고, 이 같은 성과를 소개했다.
고종 때 지어진 담장 사이의 문인 용성문과 협생문 하부에서 발견된 2동의 건물지는 가로 11.2m 세로 50m 규모로, 정면 12칸 측면 3칸의 동서 대칭 구조로 이뤄져 있다. 초석과 기단 등 건물의 기초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는 상태다.
건물터의 토층에서 조선 전기에 사용된 분청사기와 대나무마디굽의 백자편이 출토된 반면 18, 19세기에 유행한 청화백자편은 출토되지 않아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졌다가 난을 전후해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연구소는 이 건물지가 흥례문 동ㆍ서 회랑에서 경복궁 남편 궁장과 맞닿는 형태로 길게 연결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면 주칸(기둥 사이) 거리가 4m로 같고, 궁장 부근까지 계속해서 앞선 시대의 적심(積心ㆍ주춧돌을 놓기 위한 기초)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이 건물지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동ㆍ서랑(東西廊)'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6년(1434) 기사에는 홍례문 밖의 동ㆍ서랑이 의정부와 육조의 관리가 숙직하거나 회의를 위해 대기하던 장소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발굴을 담당한 이인숙 학예연구사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동ㆍ서랑이 소실된 뒤 담장시설이 만들어진 것"이라며 "기거할 수 있는 공간이 영역 구분의 기능을 가진 담장으로 바뀐 데서 궁궐 건물의 공간 구성에 대한 조선시대의 의식 변화를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발굴에서 확인된 광화문 동쪽 궁장의 기초부는 태조 이성계 당시 경복궁 창건 초기의 면모를 가진 것으로 문화재연구소는 보고 있다. 길이가 168m에 이르고 폭 2.9~3.2m인 궁장은 조선시대 궁장의 웅장했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궁장 안팎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받던 박석도 발견돼 당시 사람들이 밟고 다녔던 지표면도 확인됐다.
또 용성문, 협생문지도 양호한 상태로 확인됐다. 용성문은 고종 2년(1865)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건립된 것으로 왕이 신무문이나 영추문을 통해 궁 밖으로 이동할 때 경유하던 문이며, 협생문은 세자가 동궁으로 드는 오른쪽 측문인 이극문에서 출발해 광화문 밖으로 이동할 때 경유하는 용도로 사용된 문이다.
용성문과 협생문, 궁장 등은 모두 원래 모습대로 복원된다. 하지만 이번 사업이 고종 대로의 복원이기에 동ㆍ서랑은 복원되지 않는다. 담장 복원 과정에서 유구가 파손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지난해에도 새로 발굴된 태조시대 광화문터 유구를 해체하기로 했다가 논란 끝에 보존키로 한 바 있다. 앞으로 복원 사업에서 계속 고민해야 할 부분인 셈이다. 문화재청 궁릉관리과 측은 "조선 전기 건물지의 처리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