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주간한국 기자때 만남 시도했지만 못이뤄40년 기다림·끈질긴 설득 끝에 첫 인터뷰 '큰 반향'"이음전 여사님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길 빕니다"
1968년에서 2008년 까지 40년 동안은 내가 황성옛터와 이애리수를 찾기 위해 노력한 세월이다. 40년간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아 다닌 것은 아니고 그렇게 긴 세월동안 기다렸다는 얘기다.
사연은 이렇다. 1968년 내가 한국일보 자매지'주간한국'의 기자로 있을 때 김성우 부장이"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 받는 가요가 무엇인지 설문 조사를 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말이 제안이지 사실상 조사하라는 지시였다. 조사는 두 가지로 진행됐다. 전문가 의견을 듣고 일반 독자들의 투표도 받았다.
그래서 10곡을 선정했는데, 그 중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한 곡이 '황성옛터'였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가요가 황성옛터라는 얘기다. 박정희 대통령도 자신이 제일 좋아 하는 노래로 황성옛터를 꼽았다. 이런 내용을 조사해서 신문에 발표하고 나니까 김성우 선배는 나한테 또 골치 아픈 지시를 내렸다.
"황성옛터 레코드 오리지널 판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고, 노래 부른 이애리수를 찾아서 인터뷰 기사를 쓰라"는 것이다. 김성우 선배야, 자기는 말로하면 되지만 나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되니까 육신이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이 양반은 도대체 뭐든지 내가 나서면 되는 줄 아는 거야 뭐야?' 남 고생하는 건 생각도 안하고 "무조건 찾아내쇼!"였다.
나는 구시렁구시렁 거렸지만 하는 수 없이 신문에 "노래를 찾는다"는 사고를 냈다. 얼마 후에 부산에서 어떤 분이 연락을 해왔다. 자기네 집에 옛날 판이 수두룩하니 와서 찾아보라고 했다. 앞뒤 볼 것 없었다. 사진기자 류호석씨와 둘이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서면 어디인가를 물어 물어 그분 집을 찾아 갔더니 방안에 옛날 SP판이 하나 가득 있었다. 한참 뒤진 끝에 우리는 황성옛터를 찾아냈다. 그 기쁨이란!
그걸 껴안고 서울로 올라와서 축음기를 구해 들어 보니까 우리는 여태까지 오리지널과는 두 가지 점에서 달리 노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노래의 템포가 빠르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 그 무엇 찾으려고"라는 대목의 멜로디가 현대인이 부르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으'를 높게 올려서 노래하는데 오리지널은 '으'를 아래로 내려 부르고 있었다.
나는 즉시 작곡자 전수린씨를 만났다. 작사를 한 왕평씨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아쉬웠지만 작곡자와 가수는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된다. 전수린씨와의 인터뷰 기사는 주간한국에 곧장 실었지만, 노래를 부른 이애리수 여사는 만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968년이니까 그녀가 아직 회갑이 안 되었을 때이다. 나는 이애리수 여사가 살고 있는 곳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본인은 물론 가족들이 신문기자 만나는 것을 사양했다. 2남 7녀의 어머니로서 또는 할머니로서 조용히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구태여 지금 와서 지난 날들의 일을 들춰내어 불편해질 필요가 있느냐 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말을 남기고 나는 물러났다. 그러나 언제고 반드시 한번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고 말겠다고 나 혼자 다짐을 했다. 그 다짐이 꼭 40년 후인 2008년 10월 21일에 이뤄진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 인터넷 등에서는 이애리수 여사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으나 나는 그녀가 건재하게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후에도 장남을 통해 꾸준히 접촉을 하면서 엄연히 살아 계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알려지는 것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음전이 본명이라는 것도 밝혀야 한다고 설득했다. 또 우리나라 대중가요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분이니까 정말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더 이상 은둔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큰 아들은 결국 나하고의 인터뷰를 허락하게 됐다. 그리고 인터뷰하는 날 그가 점심식사 값을 내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아버지 배동필씨, 그러니까 이애리수 여사의 남편은 부잣집 외아들로 자랐고'맛나니'라는 간장공장을 경영했다. 또한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만큼 멋쟁이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다. 미처 피난을 못간 그는 6월 25일 전쟁이 난 날부터 9 ㆍ28 서울 수복 때 까지 3개월 동안 집의 마루 밑에서 숨어 살게 된다.
그 후 수복이 되자 친구인 국군 7사단장과 함께 북으로 갔다가 북한군이 쏜 총에 맞아 요도 관통을 당하는 큰 부상을 입는다. 간신히 생명은 건지지만 곧 바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된다. 다행히도 포로 교환 때 풀려 나오긴 했으나 집안 형편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배동필씨와 이음전 여사는 생활이 어려울 때에도 자식들에게만은 절대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항상 자존심을 지키라"는 것을 집안의 가훈으로 삼았다. 돈이 없을 때는 집에 있는 물건을 가지고 나가서 물물교환으로 생필품을 사오는 한이 있어도 누구에게 거저 손을 내미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고 한다.
이음전 여사는 지금처럼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 까지는 안산에서 장남과 함께 살았는데, 새벽 5시 반부터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운동을 했다고 한다. 운동을 할 때에도 반드시 한복을 곱게 입고 다녀서 '한복 할머니'라고 불렸다. 물론 동네 사람들 중에서도 이 할머니가 '황성옛터'를 부른 왕년의 톱 가수인지를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이애리수 여사를 만나고 나서 생존확인 기사가 10월28일자 한국일보에 실리자 우리나라의 많은 신문과 방송들, 그리고 통신과 인터넷 등에서 이 기사를 전재해 주었다. 또 네티즌들은 격려의 댓글을 올리면서 이애리수 여사의 건강을 빌어 주었다. 이 글을 통해서 그 분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당연히 이음전 여사와 가족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이음전 여사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십시오."
사진-배정환 한국보도사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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