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세계 3대 신용평가회사의 하나인 영국계 피치(Fitch)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돌연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조정하자 정부와 관련업계는 뒤통수를 맞은 듯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10월 말 300억달러 규모의 한미 통화스와프 계약의 전격 체결로 '아킬레스건'이던 외화유동성 위기가 소멸됐다고 큰소리쳤던 정부나 국가부도위험 지표나 환율 주가 등의 상대적 안정세를 반겼던 시장으로선 그런 기습적 조정을 전혀 예상치 못해서다.
불신 불러들인 '펀더멘털 타령'
흥미로운 대목은 금융권의 유동성 부족과 부실기업 구조조정 지연 등을 거론한 피치에 대해 정부보다 증권사들이 더욱 발끈한 점이다. 정부의 반응은 "글로벌 경제의 침체에 따른 신흥국의 위험을 따지다 보니 한국이 패키지로 묶여 들어간 것"이라며 "피치의 아태책임자는 금융위기 이후 우리 정부가 취한 유동성 보완과 경기부양 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의미를 축소하는 정도였다.
반면 삼성증권은 "유동성 잣대로 잰다면, 국가의 유동성 공급이 없으면 연명조차 힘든 은행들이 널려있는 미국과 유럽의 신용등급을 먼저 낮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우증권도 "자기(선진국)들은 국가 차원에서 부실기업 살리기에 나서면서 한국의 구조조정 부진만 문제 삼는 것은 모순"이라고 꼬집었다.
정작 정부가 하고 싶은 말을 증권사들이 대신 해준 셈이다. 그럼 이들의 말은 옳을까. 한때 절대 권위의 신용평가로 국가나 기업의 존망을 좌우했던 집단은 지금 악마에게 영혼을 판 군상으로 전락했다. 더구나 정체도 알 수 없는 불량채권에 우량등급을 남발한 그들의 위선과 탐욕 때문에 60억 지구촌이 대공황에 버금가는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런 친구들이 난데없이 찬물을 끼얹으며 영업을 방해하니 화날 만도 하다. 더구나 외환위기 때 가장 독하게 한국을 몰아붙인 피치인 만큼 최근 유달리 한국에 적대적인 영국언론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신용등급 경고는 10월 초 미국계 신용평가사 S&P에서 먼저 나왔다. S&P는 유동성 경색에 시달리는 한국 은행시스템의 불안이 국가신용등급 하락으로 이어질 위험을 우려하며 "은행들이 겪고 있는 유동성 문제가 효율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한국 중소기업의 자금난이 악화돼 은행의 신용도가 떨어질 수 있고 이는 다시 기업을 압박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9월 위기설'의 진정에만 안도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외환보유액과 금융기관의 건전성 등을 고려하면 무리 없이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지 보름 만의 일이다.
정부의 펀더멘털 주장을 외부에선 진작부터 우습게 봐왔다는 얘기다. 하지만 웃지 못할 일은 9월 이후 우리 금융시장이 외국의 시선이 걱정한 궤도를 그대로 답습했다는 것이다. 외환보유액을 앞세워 문제없다고 강변했던 달러유동성 문제는 미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넘겼고 국내 금융권의 건전성지표 급락이 촉발한 실물부문의 자금경색은 금융과 실물이 병합된 복합위기로 번지고 있다. 우리 정부의 시나리오에는 없던 내용들이다.
따지고 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한국 신용등급 자체를 내리지 않는 주요 이유로 건실한 거시경제 운영과 양호한 재정 건전성을 꼽아왔다. 이른 바 정부가 집착하는 '펀더멘털'일 텐데, 정부의 전방위적 경기부양책으로 인해 이 대목도 이미 안심할 처지가 아니다. 정부의 방치 속에 확산돼온 금융권과 건설회사 간 폭탄 돌리기는 언제 어디서 누구의 장렬한 죽음으로 끝맺을지 아무도 모른다. 더구나 이런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대부분 족집게로 소문난 영어교사들이다.
수학문제 푸는데 영어교사들만
시장의 고객들은 장사꾼들의 세 치 혀에 넘어가 상한 생선을 살 만큼 어리석지 않다. 워싱턴 G20 정상회의에서 한국이 신흥국 대표주자로 부상하고 한중일이 통화스와프 확대에 합의했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어제 금융시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본보 '삶과 문화' 필진인 이성주 코리아메디케어 사장이 어느 식당에서 봤다는 문구 '손님이 짜다면 짠 것이다'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식당 주인도 일찍이 아는 지혜를 그 잘났다는 관료들만 모르는 세상이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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