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도쿄에서 열리고 있는 피카소 전을 보았다. 파리의 피카소 국립미술관이 리노베이션을 하면서 2,000여 점이 세계 여러 미술관에서 전시되었는데, 도쿄에서는 230여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고 했다. 규모가 워낙 방대해 전시는 두 군데 미술관에서 나누어 진행되었다.
사실 피카소에 대해 아는 게 그다지 많지 않았다. 별스럽고 독특해서 흔히 회자되기 쉬운 천재 화가로서의 이력이나 교과서에도 수록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작품들, 상식적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 미술사적 정보뿐이었다. 게다가 입체나 추상은 쉽게 이해할 수 없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탓에 전시를 보기도 전에 기대만큼 좋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공연한 걱정을 사서 하기도 했다.
걱정이 무색하게, 나는 피카소의 여러 그림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특히 스물한 살에 그렸다는 자화상을 오랫동안 보았다. 친구의 죽음에 절망하여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각진 이마와 움푹 팬 볼, 굳게 다문 입술, 목까지 단추를 꼭 채워 잠근 검은 코트의 청년 피카소를 한참 바라보았다.
자화상은 푸르디 푸르러서 슬프고도 고독했다. 친구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지되는 삶, 그 삶을 불안하고 고독하게 응시했던 한 청년이 온전히 살아 있었다. 그 그림을 보면서 슬픔이나 좌절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잊기 위해서는 자신을 오랫동안 응시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시된 작품들은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수한 습작들이었다. 그림에 대한 안목이 얕은 내가 보기에는 더할 수 없이 훌륭한데도 여러 편의 작품이 습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숱한 습작과 여러 편의 데생은 피카소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력을 들이는지 여실히 깨닫게 해 주었다.
미술 교사였던 아버지가 오랫동안 피카소에게 비둘기의 발만 그리게 했다는 일화나, 거대한 유화작품 <게르니카> 를 그리기 위해 무수히 스케치를 하고 연습해 온 흔적이 마드리드의 한 미술관에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는 것을 보면, 피카소는 어렸을 때부터 기초를 공고히 닦고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고 치열하게 반복하며 연습을 쌓아온, 천재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천재로 성장해 온 범인(凡人)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피카소를 통해 천재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내가 천재가 될 수 없는 이유를 깨닫고 개탄했다. 게르니카>
우리는 너무 쉽게 천재라는 말에 긍정하고 주눅들면서 그들의 타고난 영감과 능력에 감탄한다. 그러느라 그들의 창조성이 지난한 노력과 부단한 학습의 결과라는 것을 자주 잊는다. 이런 낭만적 천재관은 영감과 창조성이 태생적인 것이라면 그걸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우리에게는 애당초 기회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해도 된다는 묘한 안도감을 준다. 그러니까 천재 신화는 애당초 별나게 노력하고 싶지 않았던, 평범한 우리 모두의 공모인 셈이다.
하지만 피카소가 무수히 그렸을 비둘기나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시도했던 무수한 스케치와 수정, 거기에 할애된 시간 같은 것을 생각하면 천재라는 말은 뛰어난 기억력과 이해력을 지닌 사람을 부르는 말이 아니라 집중력과 인내력을 가지고 꾸준히 연습해 온 사람을 일컫는 말임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누구나 천재일 수 있었음에도 바로 그런 점에서 안타깝게도 누구나 천재가 될 수는 없는 모양이다.
편혜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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