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낮 12시 서울 여의도의 한 커피전문점. KBS 월화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연출 표민수, 극본 노희경)에서 소신 있고 실력 있는 여성 PD로 출연하는 준영(송혜교)처럼, 방송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현직 여성 드라마PD 3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KBS PD 권계홍(34) 이소연(33)씨와 MBC PD 김경희(34)씨다. 현재 지상파 방송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 드라마PD(연출급)는 모두 4명. 2000년대 이후 여성 조연출의 수는 많아졌지만 소위 '입봉'(첫 연출작품)을 하고 활동 중인 연출자는 4명뿐이다.
이들은 자신의 일상을 비속어와 욕설을 섞어 설명할 만큼 상당히 까칠하면서도, 자신의 연출작에 출연하는 100여명이 넘는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애교작전을 펼칠 줄 아는 눈치 100단의 여우들이기도 했다.
거칠고 급박한 촬영 현장의 사령탑, 여성 드라마PD들의 희로애락을 그들의 방담을 통해 들어봤다. 소제목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노희경 작가가 쓴 리얼한 대사로 구성한 것이다.
■ "언제부터 이 바닥에 계집애들이 득실득실댄 거야"
지상파 방송사 드라마국에서 여성 PD의 숫자는 손에 꼽힌다. 때문에 일부는 '그들이 사는 세상'의 대사처럼 노골적인 불편함을 드러낼 법도 한데, 실상은 어떨까.
"여자라서 욕을 더 듣거나 그런 건 없다고 봐. 난 주로 내가 욕을 많이 하는데. 조연출한테 '이런 X!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고. 여자니까 보통 밤새는 게 제일 힘들지 않냐 그러는데, 내 경우는 포기가 제일 어려워. 연출이란 게 정해진 신을 찍어야 하는데 연기자가 안 오든지 장소 섭외가 안 되든지 장비가 없다든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연출의 마음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 매 순간이 갈등이지."(김)
"조연출 땐 그랬어. 이 균질 집단에 내가 끼어서 100% 순도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생각. 나도 성깔 있다는 거 보여줘야 하나. 근데 연출이 되니까 생각이 달라져. 드라마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나를 인정하나, 복종하나 그런 걸 보여주는 게 아니니까."(권)
■ "이게 어디서 여우 짓이야"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극중 선배인 지오(현빈)는 사고를 친 후배 준영(송혜교)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잘못했다"고 사과하자 버럭 소리를 지른다. 여성 PD들은 불필요한 대립을 막고 촬영 현장을 교통정리하기 위해선 애교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일치! 드라마에서처럼 노배우와 어린 조연출이 호칭 문제로 다툴 이유도 없다는 말이다.
"남자들이 더해. 촬영 현장 가보면 아줌마 연기자들한테 꼬리치는 게 장난 아냐. 엄마, 왔엉? 이런다니까. 대체 엄마가 몇 명이야. 물론 나도, 선생님 왜 그러세요~ 저 충분히 힘들어용, 이러지만."(권)
"데면데면하면 친해지기 힘드니까. 삼촌 되고, 누나 되고 그런 게 나아."(이)
■ "지가 작가지 감독이야"
극중 PD 준영과 작가 서우(김여진)는 캐스팅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 다툼을 벌인다. 이들은 직업적 자존심이 걸린 현장에서 작가, 배우와의 마찰도 직면한다.
"성격이 까탈스럽다는 걸로 그러진 않는 거 같아요. 일단 쪽대본을 쓰면 문제가 있지. 임무 방기 아닙니까."(이)
"이렇게 하고 싶어, 오늘은 작가의 사정으로 하루 쉽니다."(권)
"대사, 지문 하나라도 바꾸면 안 쓰겠다 이런 사람 있는데, 현장 상황이라는 게 장소나 동선이 달라질 수 있잖아. 연출을 그대로 찍어주기만 하는 '찍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 같아."(김)
■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극중 조연출 김민희(이다인)은 여자이면서도 "했습니다"를 연발하며 상명하복에 충실하다. 보통 드라마 현장에서 조연출은 통제 불능의 상황을 처리하는 해결사 역할을 떠맡는다.
"야외촬영 중에 한 아줌마가 길에서 트로트를 크게 틀고 있는 거야. 소리 좀 줄여달라고 말했더니 '이 XXX, 죽여버릴 거야' 하면서 낫을 들고 막 쫓아오는데, 냅다 뛰었지."(권)
"연출 돼선 넘기고 외면해. 흐흐흐."(김)
■ "넌 너무 쉬워"
드라마 속 PD 커플인 준영과 지오. 각자 사랑에 실패한 후 동지애를 바탕으로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사랑이 이뤄지기 전 준영과 지오가 나누는 이 대사는 순탄치 않은 여성 PD들의 연애사를 대변한다. 김경희씨는 실제 사내 연애를 통해 선배(박재범 드라마PD)와 결혼했다.
"이 바닥을 잘 모르는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는데, 오해를 하더라고요. 배우랑 스태프들이랑 술을 마시고 있다고 하니까 과거에 좀 놀았던 거 아니냐고."(이)
"여기 현빈과 송혜교 있네."(권)
"절대 아니랍니다. 이런 건 있지. 촬영감독하고 싸우고 촬영을 접은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대뜸 '그 사람들 또 그래' 이러면서 편을 들어주더라고. 밤새고 들어오면 뭐하고 들어오는지 안다는 거 정도랄까."(김)
이현정 기자 agada2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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