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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인가 모태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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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인가 모태있나

입력
2008.11.21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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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정말 독창적으로 창제된 문자일까. 학교에서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1446년 훈민정음을 새로 만들어 반포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한글과 비슷한 고대 문자는 사실 동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다.

인도 구자라트 지방과 티베트의 고대 문자, 신대문자(神代文字)로 불리는 일본 아히루(阿比留)문자 등이 그것이다. <세종실록> 과 <훈민정음해례> 에도 '옛 글을 본떠(倣古篆)'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명기돼 있다.

학계는 여러 문자 중 한글의 연원을 밝혀줄 것으로 몽골의 파스파(八思巴)문자를 주목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훈민정음과 파스파문자를 비교연구해온 국내외 학자들이 참가하는 워크숍 '훈민정음과 파스파문자'를 18, 19일 연다. 워크숍은 파스파문자로 한자의 표준음을 기록한 <몽고자운(蒙古字韻)> 의 국내 영인본 출간을 기념해 마련됐다.

■ "훈민정음은 파스파문자를 본떠 만든 것"

게리 레드야드 콜롬비아대 명예교수(한국사)는 15세기 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파헤치며 훈민정음의 기원을 추적한다. 레드야드는 고대 문자들의 자음을 비교해 훈민정음과 파스파문자가 티베트, 더 거슬러 그리스 문자와도 연관이 있음을 주장해온 학자다.

이번 발표 논문 '방고전(倣古篆)의 문제: 파스파문자와 훈민정음'을 통해, 그는 훈민정음이 본을 삼았다고 밝힌 '고전(古篆)'이 파스파문자라며 그 근거를 제시한다.

그는 상고주의(尙古主義)의 영향으로 15세기 조선의 학자들이 전서(篆書)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었음을 여러 사료를 통해 드러낸다. 이는 훈민정음보다 175년 앞서 원나라에서 만들어진 파스파문자도 마찬가지였는데, 두 문자는 모두 전서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레드야드의 설명이다.

그는 두 문자의 구상ㆍ발명 과정과 구조의 유사성, 원과 조선의 학자들이 문자 창제 후 음운론 연구에 가장 먼저 착수한 점(몽골의 <몽고자운> 과 조선의 <동국정운> 발간) 등을 들며 두 문자의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게리야드는 이번 논문에서 특히 훈민정음 반포 당시의 정치ㆍ문화적 맥락에 주목한다. 원의 통제를 받았던 고려의 문화적 유산과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세종의 가족사적 내력(이씨 왕가의 변경생활)이 그것이다.

그는 통역 교육기관인 사역원에서 파스파문자가 1469년까지 교육됐다는 실록과 <경국대전> 등의 기록을 통해 조선 초까지 이 문자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밝힌다. 신숙주, 최세진 등의 언어학 문헌들도 당시 파스파문자의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것이다.

■ "훈민정음의 자형(字形)은 독창적인 것"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국문학)도 한글에 대한 국수주의적 태도를 경계한다. 지금으로부터 560여년 전에 음운이라는 단위를 인식해, 한국어의 음운에 맞는 기호체계(훈민정음)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 교수는 초성자가 한자음의 음모(音母)에 근거해 만든 것이라 할지라도, 중성자(모음)만은 새로운 것이라 주장한다. 모음체계의 독창성이 훈민정음이 파스파문자와 구별되는, 다른 문자인 근거라는 것이다.

정 교수는 <몽고자운> 의 분석을 통해 파스파문자는 모두 티베트문자를 변형시킨 것임을 밝힌다. 반면 <훈민정음해례> 를 근거로 훈민정음의 기본 초성(ㄱ, ㄴ, ㅁ, ㅅ, ㅇ)은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것이고, 일부 자음에서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ㅇ'의 제자 방식, 음소 단위 표기법 등에서 파스파문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 교수는 천지인 삼재(天地人 三材)를 기호화해 중성체계를 만든 것은 전혀 독창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 파스파문자

쿠빌라이 칸의 명을 받아 티베트 출신 승려 파스파(1235~1280)가 만든 몽골어 문자. 몽골어뿐 아니라 중국어,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투르크어 등을 표기하는 데 쓰였다. 자음 30자, 모음 8자, 기호 9개로 이뤄진 표음문자다. 세계 문자학계에서는 이 문자가 훈민정음 창제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한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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