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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추억의 수학여행' 프로그램 인기/ "우리 고딩인데, 관람료 좀 깎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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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추억의 수학여행' 프로그램 인기/ "우리 고딩인데, 관람료 좀 깎아주소"

입력
2008.11.21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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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전 9시30분 경북 경주시 불국사(佛國寺) 앞 주차장. 고요하던 토함산 자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우르르 버스에서 내리는 검은 교복 차림의 중년 아저씨들. "두 줄로 앉으면서 번호!" 자칭 '반장' 이선우(50ㆍ대구대 직원)씨의 구령이 떨어졌다. "이 나이에 무슨 번호?"라며 구시렁대면서도 모두들 목청 터져라 번호를 외치며 앉는다. "하나, 둘, 셋…."

"너 포함해서 마흔 여섯"이란 소리에 매표소 앞에 서 있던 이성국(50)씨가 흥정에 나섰다. "아가씨, 우리 고딩(고등학생)인데예, 돈 좀 깎아주이소." 매표소 직원은 희끗한 머리카락과 교복을 번갈아보며 빙긋이 웃더니, 4,000원짜리 성인 입장권 대신 2,500원짜리 학생 단체할인권을 끊어 건넨다. "11만5,000원이라예."

아침 댓바람부터 불국사를 떠들썩하게 만든 주인공은 졸업 30주년을 맞아 신라문화원의 '추억의 경주 수학여행'에 참여한 대구 청구고 12회 졸업생들. 교복 단추 한 두 개는 기본으로 풀어헤친 이들은 간밤의 숙취로 입에서 홍시 냄새를 풍기며 간혹 담배도 꼬나물었다. 1970, 80년대 청춘영화 속 장면 그대로다. 얼굴에는 중년의 여유와 웃음이 넘쳤다.

수학여행에 짓궂은 장난이 빠질 수 없다. '청구고등학교 졸업 30주년 기념'이란 깃발을 든 반장 이선우씨와 경주 신라고 교사인 이상민씨 등이 불국사 경내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있던 30대 여인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부산 심본선원에서 성지순례 온 보살들이다. "아줌마들은 복 받았어, 우리 고딩 하고 같이 사진도 찍고." 모두가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디지털카메라에 이들 모습을 담던 미국인 엘리자베스 리더(22ㆍ여)씨는 "교복도 신기한데 졸업한 지 30년이 됐다니 믿어지지 않아요"라며 부러워했다.

이어 황성공원 운동장으로 축구 하러 떠나는 졸업생들 뒤통수를 향해 포장마차 아줌마가 한마디 던진다. "어이 학생들, 번데기 먹고 가."

민간문화단체 신라문화원이 운영하는 '추억의 경주 수학여행'이 중년들의 잊혀졌던 학창시절 추억을 되살리며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봄 첫 발을 뗀 뒤 서울 양정고와 경기고, 강원 삼척공고, 전남 여수정보과학고 등 14개팀 900여명이 이 여행을 거쳐갔다.

'추억의 수학여행' 프로그램의 산파는 경주 토박이인 진병길(45) 신라문화원장. 3년 전 서울고 동창생들이 경주에서 부부동반 행사를 연 것에서 착안한 그는 "교복을 입으면 금상첨화겠다"고 생각했다. 한달음에 영화 '신라의 달밤' 세트장이 있는 경기 남양주군까지 가서 영화소품으로 나온 교복 150벌을 맞췄다.

배 나온 중년을 위해 씨름선수도 입을 수 있는 사이즈까지 준비했다. 불국사와 첨성대 등 경주의 문화유적지도 교복 입은 중년들에게 학생 단체할인 입장료를 적용해 달라는 진 원장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추억의 수학여행'의 일등공신은 양정고다. 기수별로 4번이나 경주를 찾았다. 주축은 지난해 가을 졸업 35주년 여행을 다녀간 55회 졸업생. 백발의 은사 3명을 모신 여행에서 졸업생들은 완장 찬 규율반까지 만들어 술과 화투판을 급습했다. '미스 양정 선발대회'도 열었다.

55회 졸업생 인승일(56)씨는 "우리 기수는 당시 고교 수학여행단 철도사고의 여파로 수학여행을 가보지 못한 불운한 세대"라며 "사흘동안 교복을 입고 수학여행 기분을 내고 나니 평생 묵은 한이 다 풀렸다"고 말했다.

분위기로는 남녀공학인 여수정보과학고가 단연 으뜸이었다. 지난달 50대 중반의 남녀 70여명이 교복을 입고 천마총을 거니는 광경에 관광객들도 신기한 듯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한밤중에는 '불량' 학생들이 술병을 들고 여학생 방에 침입했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홍미자(55ㆍ여ㆍ서울 신사동)씨는 "졸업 35년만에 만난 친구들이 어쩌면 그렇게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지, 학창시절로 돌아간 착각이 들었다"며 흐뭇해 했다.

최고령 기록은 경기고의 몫이다. 지난 5월 졸업한 지 50년이 지난 칠순의 노신사 200여명이 경주를 찾았다. 특히 이들 중 절반은 미국, 일본 등 해외에 살다 이 모임을 위해 일부러 고국을 방문했다. 진 원장은 "앞으로는 회사나 단체 동료들끼리도 학창시절 기분을 낼 수 있는 '추억의 교복여행' 프로그램을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요즘 경주에서 진짜 수학여행을 온 중ㆍ고생들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수학여행지가 설악산, 제주도 등지로 옮겨지고 해외로까지 확산된 탓이다. 올 가을 경주를 찾은 중ㆍ고교 수학여행단은 열 팀이 채 되지 않는다. 현실의 수학여행이 떠나버린 빈 자리를 '추억의 수학여행'이 메우고 있는 셈이다.

경주= 글·사진 전준호 기자 jhj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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