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국 미국에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 노예해방이 선언된 지 145년 만의 일이다. 부모의 피부색을 기준으로 보면 흑백 혼혈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만, 스스로 자신을 흑인으로 규정했고 흑인 여자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으니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흑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그가, 최근 어떤 개를 키울 것인가 라는 질문에 유기견 보호소의 개들을 언급하면서 "그 개들도 저처럼 잡종입니다"라는 뼈있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오바마의 새 애견에 담긴 뜻
우리말 어법에서도 '잡종'이란 대개 순수하지 못하고 열등한 상태를 가리키는데, 영어 어법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묘한 역설을 느꼈을 것 같다.
대통령 당선자로서는 스스로를 잡종이라 부름으로써 그동안 겪었을 인종차별의 아픔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가벼운 농담으로 잡종이라는 말에 서려 있을 부정적 이미지를 털어내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듣는 사람들이 소리 내어 웃지 못했던 것은 이 말을 첫 번째 의미로 받아들였거나, 현재의 우리 문화가 '잡종'이란 말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잡종은 열등하고 순종은 우수한가?
상식과는 달리 생물학적으로 잡종은 전혀 열등하지 않다. 오히려 순종이 가지지 못했던 새로운 형질을 발현시킴으로써 생존에 유리한 경우가 많다. 순수 혈통을 고집하다 아예 대가 끊긴 경우도 적지 않다. 수백 년 동안 유럽을 지배했던 왕족들은 주로 정략적이고 무질서한 근친결혼을 통해 그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사촌 사이의 결혼은 너무 흔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지방 토호들의 딸과 결혼을 했던 고려 왕건이나 반드시 왕족이 아닌 집안에서 왕비를 들였던 조선 왕가의 전략과는 정 반대다.
그 결과 열등한 형질들이 유전자 풀에서 제거되지 못한 채 축적되었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주걱턱과 매부리코, 로마노프 왕조는 혈우병, 이베리아의 왕족은 정신병을 대대로 물려주었다. 결혼 상대가 같은 혈통에 한정되기 쉬운 유대인에게 치명적인 유전병이 많은 것도 같은 이치다. 생명은 다양성 속에서 다시 말해 잡종을 통해 살 길을 찾는다. 순수 혈통은 생존의 길이 아니다.
이 논리는 사회문화 현상에도 적용된다. 문화도 생명과 마찬가지로 다양성과 창의성이 그 본질이며 다양성과 창의성은 서로 섞이는 가운데 나온다. 그래서 전통 문화를 복원하는 일보다는 그것을 오늘의 맥락에서 살려내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 복원은 실증적 작업이지만 살림은 과거와 현재의 섞음을 통한 창조 행위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국악기로 서양음악을 연주하면 왠지 모르게 불편했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이 신선하게 받아들인다. 두 전통의 뒤섞음을 통한 창조가 성공적이었다는 뜻이다. 음식도 음악도 건축도 디자인도 영화도 학문도 이제는 퓨전이나 하이브리드가 대세다. 쉽게 말해 잡종이 되라는 소리다.
차이 인정하며 기회 균등하게
잡종이란 순종과는 뭔가 다른 차이 또는 새로움을 특징으로 하는 변종이다. 그런데 그런 변종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갑자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보게 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잡종과 차이의 창조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면 소수의 변종을 보호해야 한다. 주류사회와 다른 피부색 성적 취향, 정치적 견해, 역사관 종교ㆍ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이런 변종에 속한다.
"미국의 힘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존중과 기회균등과 민주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잡종 대통령의 당선 연설은 그래서 사회문화적 잡종 선언이다. 국가기관의 권력과 낙하산을 통해 정권에 비판적인 여론을 억압하고, 대학의 필독서로 지정된 책에 금지도서의 딱지를 붙이며, 다양한 차이들의 산실인 인터넷에 재갈을 물리려는 한국 정부의 대통령이 그와 같은 철학을 가졌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ㆍ 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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