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부모님과 저희 8남매가 6.25 피난 길에 충북 중원군 살미면의 강진이라는 마을에 정착해 살 때 일입니다. 아버지는 개울가 자갈밭을 손이 부르트도록 일궈 콩과 깨를 심고, 다시 또 자갈밭을 일구어 땅을 넓히면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삶을 살게 되었지요. 곡식들을 팔아 다시 조그마한 산중턱 밭을 사고 하면서 삶이 조금씩 나아질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집안에 소 한 마리는 있어야 되겠구먼. 옆집 밤골 양반네도 소 팔아서 부자된 거 아니유"하셨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신 어머니는 집안 돈을 다 긁어 모아 아버지께 목돈을 내주시게 되었지요.
"이 돈으로 살랑가 모르것시유. 아무쪼록 실한 놈으로 사오셔유" "그려. 내 좋은 놈으로 하나 골라 오리다" "야, 그러고 이 돈은 점심 값이니께 배 곯지말구 뜨끈한 거 잡수셔유" 장날 새벽 아버지께서 100리 정도 떨어진 충주장으로 떠나신 뒤 우리 8남매는 새로 지은 외양간에 볏짚을 깔고 죽 끓일 풀 베어 오고…, 아무튼 명절처럼 들뜬 마음으로 새 식구 맞이할 채비에 분주했답니다.
그런데 우리 가족이 땅거미지는 언덕 너머로 목을 빼고 기다릴 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께선 "이 양반 목돈 들고 가더니 무슨 일 난 거 아닌가 몰러. 내가 그리 술 자시지 말라고 했는디…"하시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끝내 저와 큰 형을 데리고 길을 나섰습니다. 컴컴한 산길에 호롱불 달랑 하나 들고 가는데 어찌나 무섭던지요. 부엉이는 부엉부엉 울어대지, 발 밑으로 족제비 같은 작은 산짐승들이 후다닥 소리를 내며 지나다니지…. 셋이 무서움에 떨면서 걸어가기를 한 시간쯤, 산길 너머로 "음메~~" 하고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머니가 큰 목소리로 "수영이(큰형 이릅입니다) 아부지~~"하니까 이번엔 소와 아버지가 함께 "음메~~" "어이, 나 여기 있구먼" 답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부리나케 뛰어간 우리는 정말 희한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지게에 송아지를 짊어지고는 땀을 뻘뻘 흘리시며 힘겹게 한걸음 한 걸음 옮기고 게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는 "보고만 있는 거여?"하시며 지게를 제게 넘겨주셨습니다. 세상에, 힌두교도 아닌데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사람이 소를 짊어지고 오다니요.
사연인즉, 돈이 턱없이 부족해 점심 값까지 다 긁어 모아봤지만 실한 놈은커녕 보통 놈도 살수가 없었답니다. 하지만 송아지를 너무 갖고 싶었던 아버지는 가장 비실비실한 놈 한 마리를 빌다시피 흥정해 살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한 10리는 잘 따라오는 듯 싶더니만 가다 서다 하더니 결국엔 주저앉아 일어날 생각조차 않더라는 겁니다. 어쩌겠습니까. 업고 가는 수밖에요. 근처 마을에서 사정을 말하고 지게를 하나 빌려서 송아지를 짊어지고 오는데 점심은 못 먹어 배는 고프지, 힘은 없지, 아버지 말을 빌리면 정말 죽을 똥을 싸셨답니다.
그렇게 힘들게 송아지를 데리고 와서 외양간에 넣고 연한 쇠죽을 끓여다가 먹이고는 쓰러지듯 하룻밤을 보내신 아버지. 그런데 이 놈의 송아지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서 무럭무럭 자라주었으면 좋으련만 쇠죽만 먹으면 설사를 해대고 힘없이 주저 앉아있는 통에 아버지는 밭일도 못 나가시고 송아지만 쓰다듬으며 노심초사하셨습니다. "아니, 그러게 담에 돈 더 모아서 사면 될 걸 왜 그런 놈을 사왔어유. 그러다 죽으면 돈 다 날리는 거 아녀유. 속상해서 못살겠구먼."
더 안 좋아진 건 아버지의 건강이었습니다. 평소에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곯아 떨어지고 누가 업어가도 모르시던 아버님께서 새벽에도 "음메~~~" 소리만 들리면 귀신같이 눈을 번쩍! 뜨시는 겁니다. 그러다 아무 소리가 없으면 다시 주무시다가, 또 한 두시간 지나서 "음메~~~"하면 다시 눈을 번쩍 뜨고는 베개에서 머리를 떼고 송아지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시고…, 내내 그러시니 피곤이 점점 쌓일 수밖에요.
사흘째부터는 아예 외양간에다 자리를 펴고 주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니, 자식 여덟을 낳아줘도 남의 자식 보듯이 하더니만 이게 뭔 일인지 모르것네" 하실 정도로 아버지는 유별나게 송아지에 사랑을 쏟으셨지요. 그렇게 일주일 이상 편안 잠 한숨 못 주무셨으니 몸살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큰누나가 새벽녘에 일어나 쌀 씻으려고 우물 쪽으로 가려는데 어디선가 시름시름 앓는 소리가 들렸답니다. 아버지가 외양간에서 식은땀을 흘리시면서 끙끙 앓고 계셨던 겁니다. 어머니는 "이제 그만 혀유. 송아지 살리려다 과부 되겄구만유. 이제 그만 하면 됐으니께 나머지는 천지신명님한테 ?쒼騈?하셨지요.
그런데 아버지 정성이 하늘에 닿은 것이었을까요? 송아지가 조금씩 기운을 찾기 시작했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옆에서 너무 괴롭혀서 송아지가 더 아팠나?"하고 우스갯소리를 했습니다. 그렇게 건강해진 우리의 새 식구 송아지에게 '누렁이'라는 이름도 붙여주었습니다.
나무하러 갈 때나 밭 갈러 갈 때 매일같이 친구가 되어주었던 우리집 누렁이, 큰 누나 시집갈 때 남의 손에 누렁이 고삐를 넘겨 주시고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시던 아버지의 모습, 가기 싫어 "음메~ 음메~" 울면서 자꾸만 뒷걸음 치는 누렁이를 온 가족이 끌어안고 "누렁아, 누렁아" 외치면서 펑펑 울었던 그 때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을 글썽거리게 하는 저의 옛 추억이랍니다.
그 뒤 다시 새로운 송아지가 와서 정을 붙이곤 했지만 우리집 첫 송아지 '누렁이'는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네요. 가축이지만 참 가족 같은 느낌이 드는 소, 그 순한 눈망울을 바라보면 마음까지 편안해졌었는데…. 누렁아, 그때 참 고맙고 행복했어. 담에 만나면 안 팔 테니까 하늘나라에서 꼭 만나자~.
※ MBC라디오 표준FM(수도권 95.9㎒) <여성시대> 에 소개된 사연을 매주 토요일 싣습니다. 여성시대>
경남 마산시 - 문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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