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의 한 중고 명품매장. 20대 후반의 여성이 여행용 가방에서 물건을 후루룩 쏟아 냈다. 거의 새 것처럼 보이는 검정색 루이뷔통 가방과 샤넬 숄더백 그리고 광택이 있는 카르티에 시계, 보석으로 장식된 구두와 명품의류 등 10여 점을 내놓으며 "모두 얼마나 받을 수 있냐"고 물었다.
잠시 후, 진품 여부를 꼼꼼히 확인한 여직원이 계산기를 서너 번 두들겨 보더니 "400만원"이라고 하자, 이 여성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모두 합하면 2,000만원이 넘는데…"라면서도 얼른 100만원 짜리 수표 4장을 받아 들고 가게 문을 나섰다. "왜 한꺼번에 파냐"는 물음에 이 여성은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 져서"라고 말한 뒤 황급히 사라졌다.
한국 소비문화의 아이콘인 서울 압구정동에도 불황의 그늘이 닥치고 있다. 중고 명품 매장 30여 곳이 몰려 있는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 갤러리아 백화점 건너편 200여 미터 정도 되는 양쪽 골목은 올 여름까지만 해도 신상품과 다름없는 중고 외제 명품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는 입소문 때문에 주말이면 명품을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
하지만 최근에는 불안한 경기 상황을 반영하듯 사람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그나마 물건을 사는 사람보다 팔려는 사람의 비중이 부쩍 늘었다. 9월 이전에는 물건을 팔려는 사람이 전체 손님의 20% 정도였으나 최근에는 30~40%로 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중고 명품을 팔려는 이들의 절반 이상은 20,30대 여성. 이중에는 부유층 '명품족'을 맹목적으로 따라 하려다 사정이 어려워지자 물건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김모(28ㆍ여)씨는 300만원이 넘는 가방을 팔려고 왔는데 "쓰지 않는 것을 팔려고 왔다"고 했다가 "연체된 카드 빚이 조금 있다"고 털어놨다.
가게 점원 김모(29)씨는 "과거에는 유흥업소 여성분들이 성형수술 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해 찾아 왔으나 요즘에는 장사가 안돼서 그런지 빚 때문에 찾아오는 경우가 늘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급전이 필요한 30,40대 남성도 심심치 않게 찾고 있다.
27일 오전에는 가게들 문이 열리기도 전에 중소기업을 운영한다는 박모(39)씨가 10년 전 모델의 롤렉스 시계와 모피 2벌 등을 갖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직원들 월급이 밀려서 왔다"며 300만원을 손에 쥐고 돌아갔다.
고급 전당포 역할을 하는 명품 중고시계 가게도 물건은 팔리지 않고 맡겨놓은 물건만 쌓여 울상이다. 이곳에서 10년 가까이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고급시계만 취급했다는 장모(46)씨의 매장은 채 2평이 못 돼 보이지만 매장에는 피아제, 브레게 등 수천만원이 넘는 고급 시계가 진열장에 가득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신상품 2,000만원 정도 하는 시계를 상태에 따라 500만원 정도 대출을 해 주고 보관하고 있는데 기한이 넘어도 찾아가지 않는 사람이 많다. 불황이 실감난다"고 말했다.
반면 온라인 중고제품 판매업체는 거래량이 급증하고 있다. 옥션의 경우 의류와 가방, 유아용품 등의 9월 중고물품 거래가 작년 동기에 비해 30% 이상 늘었다. 20,30대 방문자 수도 50% 이상 증가했다.
이 업체의 임정환 과장은 "20,30대까지 중고품 거래가 늘어났다는 것은 어려운 경제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며 "마케팅 차원에서 중고물품 거래를 활성화시키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송태희 기자 bigsmile@hk.co.kr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