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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 악기 수집광, 75세 황병창씨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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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의 악기 수집광, 75세 황병창씨의 꿈

입력
2008.11.17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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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악기 전시만 하는 건 싫고, 아이들이 맘껏 연주하며 소리 나는 원리를 익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음악이 좋아 평생 악기를 만들고 수집해 온 칠순 어르신이 악기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주인공은 충북 제천시에서 작은 음악교실을 운영하는 황병창(75)씨다. 그는 이곳에서 사회복지시설과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 무료로 악기를 가르치고 있다.

11일 오후 제천시 동명초등학교 옆 골목에 자리잡은 황씨의 '아지트'를 찾았다. '미래악기음악연구소'란 문패를 단 이곳은 악기 전시장을 연상케 했다. 바닥에는 피아노, 오르간 등 부피 큰 건반악기와 봉고, 드럼 등 타악기가 줄지어 섰고, 벽면 선반에는 아코디언, 바이올린, 비올라 등이 가득 차 있다.

황씨 부부가 생활하는 같은 건물 2층에 오르자, 처음 보는 희귀 악기들이 인사를 건넨다. 나팔 달린 바이올린, 울림판이 구렁이 가죽으로 된 베트남 전통 현악기, 1,800년대 제작된 프랑스산 피아노….

"집에 있는 건 극히 일부일 뿐"이라며 잡아 끄는 그와 함께 자동차로 40여분을 달려 도착한 제천시 송학면 오미리 로뎀청소년학교. 조립식 패널로 지은 창고 문을 열자, 오래된 악기에서 나는 특유의 고목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만든 지 100년이 훨씬 넘은 미국, 독일산 피아노와 오르간이 그득하고, 국내 최초의 피아노와 풍금도 눈에 띄었다.

황씨가 이곳 저곳에 보관하고 있는 악기는 모두 합쳐 600여점. 그는 "정리가 안돼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희귀한 악기 부품과 악기 제작 기계까지 합하면 소장품은 1,000점이 넘을 것"이라고 했다.

경북 안동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잡동사니를 닥치는 대로 줍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망가진 아코디언의 바람통을 문종이로 발랐다가 신기하게도 소리가 나는 걸 경험하곤 악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손재주가 유별났던 그는 이 때부터 하모니카, 풍금 등을 뜯었다가 다시 조립하는 일에 골몰했고, 연주법도 스스로 익혔다.

공군 군악대에 지원한 그는 실력을 인정 받아 8년간 악기관리 총책임자를 맡았다. 이 때 거의 모든 악기의 구조와 제조법을 섭렵했다. 공군본부 교회 지휘도 맡아 작곡과 편곡까지 마스터했다.

그는 제대 후 20년 가까이 악기 공장을 운영하다 은퇴한 후 본격적으로 악기를 모았다. "희귀한 악기가 있다"는 말이 나면 어디든 달려갔고, 해외선교단 등의 도움으로 세계 각국의 악기도 사들였다.

황씨가 박물관 건립을 서두르는 것은 요즘 들어 마음이 조급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2003년 직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법원의 비행 청소년 수탁기관인 로뎀청소년학교에서 악기 가르치는 일을 막 시작한 때였다.

"길어야 3개월밖에 못산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남모르게 유서를 두 번이나 썼어요. 그런데 어차피 죽을 거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실컷 봉사나 하고 죽자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낙천적인 성격 덕분인지 그는 기적적으로 병을 이겨내고 여전히 로뎀학교 음악 선생님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두 차례의 대수술 탓에 건강이 예전만 못하다. 그러니 잔뜩 쌓아놓은 악기만 보면 초조해진다.

악기 보관도 한계에 다다랐다. "2년 전 폭설로 로뎀학교 뒷마당에 설치한 천막 창고가 무너져 안에 보관하던 피아노 50여대가 모두 망가져버렸어요. 지금은 구할 수 없는 골동품도 많았는데…. 체계적으로 악기를 보관하고 관리해야 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죠."

황씨는 이달 들어 수집해놓은 악기를 손질하고 시대별, 구조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희귀한 부품과 악기 제조 기계도 정리중이다. 박물관 터 마련 등에 힘을 보태 줄 독지가와도 접촉하고 있다.

황씨가 구상하는 박물관은 여느 박물관과는 다르다. 악기 전시 외에 음악을 사랑하는 청소년들이 악기를 배우고 제조 기술까지 익힐 수 있는 공간을 두어야 한단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던 청소년들에게 음악과 악기만큼 희망을 주는 수단은 없는 것 같다"는 그는 "박물관과 함께 악기 기술자를 양성하는 전문 학교도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제천=한덕동 기자 dd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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