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태극기 휘날리며”
베를린영화제로부터 초청장이 날아왔다. 제작자와 두 여주인공, 감독의 항공티켓과 체류비 일체를 부담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부지원도 결정되었다. 영화진흥공사에서 대표단을 구성했다. 공사 설립 후 세계3대영화제(칸느, 베를린, 베니스)의 본선경쟁부분에 초청받은 첫 케이스였다. 나는 나의 제1의 후원자인 아내를 대표단 명단에 포함시켰다.
1985년 1월15일. 우리는 베를린으로 향하였다. 남지나반도를 돌아야 하는 20여 시간의 긴 비행이었다. 탑승한 항공기는 150여석의 중형 CPA기였다. 당시 한국은 유럽과의 교류가 적어 우리를 제외한 승객이 거의 외국인이었다.
비행기가 김포공항 활주로를 벗어나 영공을 벗어나자 나의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다. 1967년 10월1일 밤, 18년 전. 한국을 떠나던 그 밤이 생각났다. 그 때 나는 한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홍콩영화사에 전속되어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을 떠났었다.
그리고 2년 후, 세계적 스타로 성장하려면 약소국인 ‘한국인’이라는 명찰을 버리고 ‘홍콩인’ ‘일본인’으로 바꿔야 한다는 제안을 거부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왔던 나. 반드시 세계 최고가 되어 태극마크를 달고 저들 앞에 다시 서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던 나. 귀국하여 그야말로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되찾았던 배우로서의 정상자리. 그 화려한 자리를 또 마다하고 새로운 우주를 만들겠다며 ‘감독의 돛’을 달고 망망대해로 뛰어들었던 나. 그리고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든 작은 영화 <땡볕> . 땡볕>
‘동녘의 이 지독한 아해’가 예뻐 보였는지 ‘신’이 미소를 보여주신 것이었다. 다행히 한국여승무원이 우리를 알아보고 고급술과 과일 등을 내왔다. 일행 모두가 기분이 좋아 왁자지껄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가 소란을 떨어 그런가 싶어 쉬쉬하며 각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그 때 내 귀를 송곳처럼 찌르는 소리가 있었다. 어린아이의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였다. 내 기분에 취해 그때까지 듣지 못했던 아기의 울음소리가 기내를 진동하고 있었다. 승객들이 노골적으로 승무원들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기내 끝에 한 젊은 동양여성이 아이를 안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달래고 있었다. 안절부절 못하며 승객들에게 사정하고 다니는 한국여승무원을 잡고 물었다. 사연인즉 아기를 입양시키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기와 데리고 가는 사람 모두 한국인이었다. 생명을 태어나게 하고 책임지지 않은 채 그냥 버려버리는 나라. 유학 가는 비행기 삯을 구하기 위해 입양아를 대신 데리고 가게 하는 나라. 아기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듣고 있는 내가 울음이 터지는데 아이가 울음을 그칠 리 없었다. 나는 터지는 울음을 삼키고 여학생에게서 아기를 빼앗듯이 안았다.
순간 아기의 울음이 뚝 멈췄다. 모두가 놀라 쳐다보았다. 나도 깜짝 놀라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아기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퉁퉁 부은 눈이 잠시 깜박이다가 내 눈에 눈을 맞췄다. 내가 그 눈동자에 웃음을 던지며 한번 흔들어 주자 아기도 활짝 따라 웃었다. 기내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기의 눈동자는 한 순간도 내 눈동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떨궁, 떨궁”하며 어르자 아기가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느새 아기는 내 품에서 잠들고 있었다. 새록새록 잠든 그 아기의 숨소리를 듣는 나의 가슴은 한 없이 떨고 있었다. 10시간이 훨씬 지났다. 아내가 교대하자고 하였다. 나는 힘들지 않다고 하였다. 아기는 내 가슴이 ‘그의 나라, 그의 부모 품’인 줄 알고 편안히 잠들고 있었다. 몇 시간 후 그를 보내야한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떨려왔다.
마침내 그 시간이 당도했다. 푸랑크후르트 공항에 비행기가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유학생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아기가 가야 할 목적지였다. 아기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유학생은 아기가 깨지 않게 조심하여 안았다. 아기가 내 품을 떠나는 순간 내 뜨거웠던 몸이 차갑게 얼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차마 아기가 떠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 때, 아기의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비명이었다. 나라가, 부모가 아기를 버렸듯 ‘나도’ 버린 것이었다.
대망의 꿈을 갖고 도착한 베를린, 그 곳에서도 그 연장선상의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서독의 장벽이 세워져 있는 서쪽 베를린 광장 앞 베를린국제영화제 주 상영관 ‘조 팔라스트 극장’이 전쟁으로 부서진 성당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앞 국기 게양대에는 본선경쟁부분에 진출한 15개국의 국기가 계양되어 있었다.
태극기가 그 傷?가장 크게 펄럭였다. 1960, 70년대 한국경제가 매우 어려울 때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로 와 자리를 잡은 한국인들이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으로 모여들었다. 프랑스의 장 뤽 고다르, 미국의 토마스 버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선 한국의 감독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자랑스럽고 기뻤던 것이다.
나는 그들과의 시간을 외국인들과의 행사보다 더 많이 제공하였다. 국가가 어려운 시절, 해외유학과 좀 더 나은 수입을 얻기 위하여 독일로 건너와 광부생활과 간호사 생활을 해야 했던 그들은 그 동안의 이루 형언할 수 없었던 고생 이야기며, 너무나 그리웠던 한국 이야기며, 영화 이야기를 나와 함께 하룻밤 맥주를 마시며 나누고 싶어했다.
그런데 기자회견장에서 반정부 성향이 짙었던 재독학자 송두율씨가 <땡볕> 이 검열당국에 의해 난도질당했다며 그 과정과 한국독재정권에 대하여 폭로하라고 외쳐댔다. 한 순간에 기자회견장이 한국정부 성토장으로 변해 버렸다. 회견장 뒤에 서 있던 중앙정보부 독일 한국대사관 파견 영사가 급히 자리를 떴다. 땡볕>
나는 송두율씨에게 국내 이야기는 기자회견 후 사석에서 따로 하자고 제의하고 기자출입증이 없는 사람은 퇴장시켜달라고 주최측에 부탁하였다. 송두율씨는 진행자에 의해 퇴장 당했다. 송두율씨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의 치부, 우리의 저열함이 저들 앞에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았다.
‘부끄러운 한국, 나쁜 한국인’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반성하고 고쳐야 할 문제였다. 회견을 마치고 나는 밤새 송두율씨와 맥주를 마시며 나라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그가 너무도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역시 방법은 다르지만 나의 나라사랑에 대한 생각을 잘 이해하였다.
2월의 베를린 밤은 매우 추웠다. 살얼음 같은 바람사이로 내리는 눈발은 검은 아스팔트 위에 쌓여가고 있었다.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 베를린을 떠나던 날 밤까지 추위도 잊은 채 나는 동포와 두고 온 ‘아름다운 대한민국, 아름다운 대한민국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세계 영화인들과 ‘아름다운 한국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그날, 한국 영화는 세계영화사를 향해 한 발자국 더 다가가고 있었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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