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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은의 名品 먹거리] 소박하지만 깊은 여운… 맛선물 "명품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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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은의 名品 먹거리] 소박하지만 깊은 여운… 맛선물 "명품 이상!"

입력
2008.11.14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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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란. 신(新)여성 같기도, 시인 같기도 한 이름의 처자를 '언니, 동생'하자며 처음 알게 된 날, 그녀는 나에게 매실 진액을 선물했다. 본가는 칠갑산에 있다고 해서 내가 '칠갑산 처녀'라 부르는데, 건강 챙기라고 엄마가 직접 담가 주셨다는 청정 매실 진액을 우리의 '첫 만남'을 위한 선물로 한 병 따라서 줬다.

당시 빡빡한 스케줄로 밥만 먹으면 곧잘 체하던 나는, 속이 거북할 때면 그녀가 나눠 준 매실 진액을 한 스푼씩 먹고 힘을 내곤 했다.

■ 청양고추, 은산국수, 구기자

국수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여란이 공수해 온 연말선물은 은산국수. "가끔 엄마가 만들어 주는 우리 동네 국수에요. 맛보세요"하면서 청양고추 한 봉지, 칠갑산 구기자 500그램과 국수 한 묶음이 담긴 묵직한 쇼핑백을 내 어깨에 걸어 주었다.

집에 돌아와 국수를 뜯어보니, 제법 굵기가 있었다. 면발이 가녀리지가 않으니 육수를 진하게 우려서 말아야 맛있나? 그러면 고기 국수로 해야 맞나? 하지만 고기에다가 두꺼운 국수까지 한데 씹으려면 좀 질리는 맛일 것도 같은데…. 한참을 고민하다가 국수를 건네 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란, 너의 국수를 먹으려 하는데 어찌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 집에서 어머님이 어떻게 만들어 주시니?" 물었더니, 어머니와 통화를 잠깐 하고 다시 전화를 걸겠다며 끊었다.

3분 후 전화벨이 울리고 "애호박을 많이 썰어서 파, 마늘, 고춧가루랑 들기름에 볶으래요. 그리고 깨를 많이 쳐서 국수랑 비벼 먹으면 우리 집 스타일. 그런데 언니, 동네에서 잔치 같은 거 있을 때에는 호박 볶은 것을 고명으로 올리고 멸치 국물에 말아서 훌훌하게 먹어요" 한다.

전화를 끊고 멸치, 다시마, 파 머리, 양파 조금, 무를 넣고 육수를 끓이고 있는데 그녀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깨를 듬뿍 쳐야 해요."

여란과 어머님의 조언대로 애호박을 듬뿍 볶아서 소금 간만 약간 하고, 삶은 국수랑 비비듯이 먹어 보았다. 와, 툭툭 끊기는 맛이 그만인 투박한 면을 보드랍게 익은 애호박이 완벽히 받쳐준다.

들기름 냄새가 솔솔 풍기고, 듬뿍 넣은 깨가 씹히는 맛을 더한다. 청양산 고춧가루를 넣어 볶았더니 국수 한 그릇에 발그레한 빛이 돌아,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인다. 구운 김을 곁들여가며 한 그릇을 뚝딱 먹고, 맑게 우린 멸치 국물을 부어 반 그릇 정도 더 먹을 수 있었다.

나를 만날 때마다 '칠갑산에 한번 놀러 오라'고 하는 그녀의 동네 맛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동네에 잔치가 있으면 산처럼 소복이 호박을 썰어 나눠 앉아 볶아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주민들, 부녀회관이나 마을회관 주방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고소한 기름 냄새, 맑은 공기와 산바람.

'맛 선물'은 칠갑산 구기자를 대추 몇 알과 끓여 낸 구기자차를 마시면서 완성되었다. 구수하고 깊은 맛의 구기자 물에 대추의 은은한 단맛이 섞여 요즘 날씨에 딱 맞는 차다. 구기자는 피를 맑게 한다니 나처럼 원고 마감 스트레스나 추위와 함께 늘어난 술자리로 인해 피가 탁해진 사람에게는 약과 같다.

■ 민트 잎차, 쿠키, 인삼주

'인자'라는 인자하신 성함의 엄마 친구 분은 직접 길러 따고 말린 민트 잎을 예쁘게 포장하여 친구 분들에게 선물하신다. 그 잎이 하도 깨끗하고 향이 좋아서 나도 몰래 가져다 마실 정도.

찻잎은 어느 것이나 영양이 가득하지만, 민트차는 특히 기분 전환이나 식곤증에 좋다. 엄마랑 민트차를 마실 때마다 "인자 아주머니 정성이 대단하셔"라고 모녀가 한 입으로 이야기한다.

쿠키를 맛나게 굽는 미선이라는 이름의 동생은 직접 구운 쿠키를 종종 선물해 준다. 하트 모양이나 동물 모양의 쿠키는 믿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져 입이 심심할 때 한 개씩 먹는다.

기자였던 남편과의 오랜 인연으로 나도 열렬한 팬이 되어버린 사진가 이강빈 선생님은 요리 솜씨가 좋으셔서 정작 요리를 업으로 하는 나를 부끄럽게 하시는데. 그 분의 작업실 창고는 지인들이 모두 탐내는 보물이 가득하다. 직접 담근 갖가지 술, 촬영 때 챙겨 오신 산지 농산물, 너무 맛있는 땅콩이나 멸치 등이 바로 그 보물이다.

한번은 직접 담그신 인삼주를 쪽쪽 받아 마시는 나를 보시고는, 작은 생수병에 따로 담근 인삼주를 선물로 쥐어 주셨다. 두어 번에 나누어 홀짝 마실 때마다 감사했다.

나도 가끔씩 선물을 고를 상황이 오면, 먹을 것을 살 때가 많다. 받는 사람들이 누구나 좋아하는 품목은 한산 소곡주나 국산 참기름. 올 연말에도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사러 성남 기름시장에 가고, 인터넷으로 소곡주를 주문할 예정이다.

맛있는 국수 한 묶음, 직접 빻은 고추 가루, 예쁜 유리병에 담은 구기자나 말린 민트 잎, 맛있게 배합하여 만든 쌈장 한 통이나 꽁꽁 얼린 만두 등 정이 함빡 담긴 먹거리는 입에 남고 가슴에 남는 진짜 '명품 선물'이다.

박재은ㆍ음식 에세이 <밥 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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