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제목의 방자함을 독자들이 해량하여 주셨으면 좋겠다. 이 글이 흘긋 엿볼 책의 표제가 <들어라 청년들아> 여서, 그 제목을 살짝 비틀어본 것뿐이다. 물론 그 비틂에는 내가 이 책의 논지에 '고스란히는' 공감하지 않는다는 뜻이 배어 있다. 이 책 저자 정과리는 불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는 문학평론가다. <들어라 청년들아> 라는 표제를 보고, 나는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 를 떠올리며 '이제 정과리가 정치 팸플릿도 쓰나?'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들어라> 들어라> 들어라>
보수적 인문학자의 문화 읽기
그러나 부제 '정과리 문화 읽기'가 암시하듯, 이 책은 일종의 문화비평서다. 거기서 문화란, 자연을 뺀 삶의 모든 것, 곧 정치 사회 예술 일상 따위를 아우르는 넓은 개념이다. 곧, 저자의 전공인 순문학 바깥의 세상사를 살핀 에세이들을 모은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의 글들을 지난 10년에 걸쳐 썼다고 한다. 그 10년 동안 먼 발치에서 정과리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나는 그가 (나쁜 의미의) 정치적 보수주의자이자 (좋은 의미의) 문화적 아방가르드가 됐다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들어라 청년들아> 를 읽고 보니, 정과리는 정치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좋은 의미의 보수주의자인 듯하다. 한국 인문학자들 가운데 정과리만큼 디지털 세계에 소양이 깊은 이도 드물 텐데, 그는 관심의 방향이 자신과 비슷한 소설가 복거일과 달리 이 새로운 세상을 장밋빛으로만 칠하지 않는다. 들어라>
정과리는 디지털 문화의 쌍방향성에 대해 코웃음을 치고(생산자와 향유자가 동일 평면에서 만나는 일은 결코 없으므로), 포스트 휴먼 세상을 우울하게 전망한다(컴퓨터를 만든 것도 사람이고 인터넷을 구축한 것도 인간이지만, 조상이 자손의 영원한 지배자가 되리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으므로). 정과리를 불편하게 하는 '사유하는 기계'는 제레미 리프킨이 <노동의 종말> 에서 '실리콘 칼라'라고 불렀던 구식 로봇이 아니라, 질 리포베츠키와 장 세루아가 <누리-문화> (La Culture-monde)에서 '테크노 사피엔스'라고 부르는 최첨단 사이보그다. 호모 사피엔스를 테크노 사피엔스가 대체하고, 심지어 지배할 가능성에 전율을 느끼지 않을 호모 사피엔스는 드물 테다. 누리-문화> 노동의>
<들어라 청년들아> 의 폭 넓은 관심을 이 짧은 칼럼에서 주유할 수는 없다. 그러니 젊은이들을 향한 '계몽'의 열정이 가장 도드라지는 마지막 장에 대해서만 몇 마디 하자. 저자는 여기서 디지털 세계와 한국 판타지소설과 한국 젊은 세대를 솜씨좋게 포개면서, 한국 청년문화의 미숙함을 질타한다. 이를테면 "그곳의 글쓰기는 문장의 기본부터 다시 가르쳐야 할 것들로 가득차 있다"거나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들은 아직 글쓰기 이전에 있다"(pp 248~249) 같은 진단들이 그렇다. 들어라>
그러나 나는 이름난 중년 노년 지식인들의 날림 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명료하고 윤리적인 20대 청년들의 한국어 텍스트를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문법도 엉망이고 내용도 부정확한 외국어 텍스트를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하듯. "디지털 공간에서 생산되는 문화의 95%는 쓰레기"(p 184)라는 저자의 선고가 외국어 텍스트까지를 아우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디지털 공간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일 게다. 좋은 것은 어디서나 드문 법이다.
좋은 것은 어디서나 드문 법
내가 확연히 느끼는 것은, 요즘 청소년들이 청소년 시절의 내 세대보다 생각도 깊고 글쓰기에도 능숙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디지털 공간이, 비록 적잖은 부작용을 낳고 있긴 하나, 문화의 민주주의를 넓혔다는 뜻이다. 나는 저자의 계몽주의가 나이든 세대를 향했으면 좋겠다. "미숙함이 그 자체로서 개성적인 가치로 인정 받는 사태, 인정 받을 뿐 아니라 요란하게 선전되는 사태"(p 250)의 책임은 청년들한테가 아니라 나이든 세대, 곧 우리들한테 있으니 말이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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