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났던 일이 벌써 쉰여덟 해나 지난 옛날 일이 되었습니다. 그 때 겨우 열 세 살이던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아버지도 잃고 집도 잃었습니다. 세상이 온통 무너진 거죠. 지금 그 아이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내일이 없었지. 꿈조차 꿀 수 없었어. 그러나 그래서 절망도 없었어. 절망은 꿈을 지닌 아이들이 가진 특권인 것을 터득한 것은 참 오랜 뒤의 일이지. 그러고 보면 절망도 축복이야!"
그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었습니다.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애비가 된 그 아이는 자식을 애비 없는 자식처럼 키웠습니다. 그 자식에게 애비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바로 자기 자식의 애비이면서요. 그래서 자식들이 애비가 없어도 살 수 있도록 혹독하게 키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아이는 일흔이 넘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온갖 세상물정 다 겪은 세월을 되돌아보며 노년의 휴식을 누릴 만큼 살림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자기 문패가 달린 집도 지니고 삽니다. 그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얼마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해가 뉘엿거리면 집에 가고 싶었어. 그러나 갈 집이 없었지. 그런데도 초조해 못 견딜 만큼 집에 가고 싶었어. 그리고 서서히 어둠이 내렸지. 그런데 지금은 돌아가야 할 집이 있어. 한데 알 수 없는 일이야. 집에 가서 발을 뻗고 누웠는데도 여전히 집에 가고 싶은 거야!" 그리고 그 아이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아무래도 내 성장은 그 때 멈추었나봐."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보면 진단이 간단합니다. 이제 늙은이가 된 그 아이는 외상성 신경증(外傷性 神經症) 환자인 거죠. 이처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트라우마'라고 한다는 것, 우리 모두 압니다.
증상(症狀)은 여러 가지입니다. 당했던 일을 반복해서 경험하듯 느껴 시달리는 경우도 있고, 그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 사건과 관련된 화제로 이야기하는 것을 신경질적으로 피하거나 아예 기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지속적으로 과민상태에 빠져 잠을 못 잔다거나 화를 낸다거나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는 증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아이가 일생을 이렇게 내내 '앓고 살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살다 보면 이런저런 가슴앓이가 없을 수 없는 것이 사람살이인데, 그래도 전쟁을 겪고도 죽지 않고 살아 남았는데, 그쯤 속앓이야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 그 늙은 아이처럼 어느 고비에 이르면 그 일을 되뇌면서 다시 번듯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늙은 아이의 마지막 말은 가슴을 찢어 놓습니다. "내 성장은 그 때 멈추었나봐"하고 내뱉은 말 말입니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이 병을 고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억압된 기억을 스스로 의식하도록 하고 적절하게 그 때 겪었던 느낌을 다시 경험할 수 있게 하면 점차 그 증상이 낫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지난 다음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치유 이전, 성장이 멈춘 채 살아온 그야말로 '잃어버린 세월'들은 이미 메울 길이 없습니다. 그 가슴앓이로 소모된 세월, 그 분노로 자기를 불태우며 소진한 세월, 지금도 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세상살이를 잘못 인식하고 잘못 판단하고 잘못 행동한 세월은 보상 받을 수가 없습니다. 기막힌 일입니다.
성장이 멈추었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인간이 될 가능성과 잠재력을 펼 기회를 차단 당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열세 살 나이에서 더 크지 못했는데 몸은 자라 어른이 되고, 자식을 낳고, 사회생활을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신이나 그 가정이나 그 사회가 제 모습을 지녔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행하다고 해야 할는지요. 그렇게 '건강하게 자라지 못한 어른이 일궈온 세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감지한 것 같은 낌새는 어디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6ㆍ25세대만 그렇겠습니까? 그 이전의 식민지 세대도 그랬을 것입니다. 4ㆍ19 세대도, 군사정권 세대도, 민주화 세대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모두 자기네 트라우마를 겪었을 것이고, 그래서 모두 바로 그 시점에서 '성장이 멈춘 채' 그 이후를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트라우마의 내용은 각기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한결같은 것은 모두 그 자리에서 성장이 멈춘 채 한 치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우리 사회에서 제각기 다른 세대들이 자기 시대에 왜 이렇게 철저하게 '고착'된 채 꿈쩍도 하지 않는지를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미국에서 흑인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겪었을 트라우마, 아니, 미국의 흑인들이 겪었을 트라우마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를 짐작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트라우마가 오바마와 흑인들의 성장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주목할 것은 트라우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그 치유의 처방입니다. 그리고 이 때 우리는 문득 오바마의 당선 연설에 배음(背音)처럼 깔려 있는 소리를 듣습니다. 마틴 루터 킹의 저리게 감동스러웠던 '우리는 꿈을 가지고 있다'는 연설이 그것입니다.
그는 어쩌면 아픈 상처를 후벼 파며 거의 자학적으로 '과거'를 저주하는 것으로 트라우마를 벗어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복수를 다짐하면서 증오를 선동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러면 속이 다 후련했을 터인데, 그가 외치고 펼친 것은 오직 현실에 대한 정직한 진단과 환한 내일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연설의 울림은 마흔 다섯 해가 지난 세월에도 여전한 채 오바마는 그 여운을 좇아 내일을 위한 '변화'를 외치며 마치 그 연설을 마무리하듯 그 꿈을 실현했습니다.
부럽습니다. 트라우마는 이렇게 치료됩니다.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 앞에 벌어진 현실입니다. 몽롱한 꿈이 아닙니다. 기적도 아닙니다. '환자들'이 일궈낸 생생한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마틴 루터 킹이 없어도 좋습니다.
꿈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소리가 없어도 좋습니다. 이를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트라우마 때문에 내 성장이 멈추었다는 사실을 승인한다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바마가 없어도 좋습니다. 그 늙은 아이의 탄식만으로도 넉넉하지 않겠습니까?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 · 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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