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CEO형 대학총장'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어윤대(63) 전 고려대 총장은 국내 1세대 국제금융 전문가다. 현실경제와 정책에 대한 관심도 높다. 11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우리는 지금 세기적 전환기의 한 가운데 서 있다"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루빨리 준비를 서둘러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 굉장한 불황이죠?
"미국, 유럽, 일본이 내년 모두 마이너스 성장을 할 거라는 예측이 있지 않습니까. 20세기와 21세기를 통틀어 처음으로 세계 주요 선진국 경제가 동시에 후퇴하는 해가 내년이 될 것입니다."
- 선진국들이 기침을 하면 개도국들은 독감에 걸립니다. 개도국들도 힘든 시기가 되겠지요?
"개도국들은 그나마 굴러갈 겁니다. 특히 동력은 중국입니다. 이미 구매력 기준으로는 국민총생산(GNP)이 세계 2위인 나라가 성장률이 8%대로 떨어진다고 하니 엄청난 부양책을 쓰지 않습니까. 4조위안은 엄청난 돈입니다.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얘기죠."
- 중국 경제를 낙관하십니까. 안 좋게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중국이 오히려 세계경제에 뇌관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재미있는 것이 지난 수세기 동안 세계경제의 헤게모니 변천사를 보면 대략 100년마다 패권국이 바뀌었습니다. 1915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패권이 넘어갔고요. 그 100년 전에는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갔습니다. 1985년 일본이 한참 좋을 때, 그 패권이 일본으로 가는 것 아니냐고 했는데요. 이번에는 패권이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로 오는 것 같습니다. 헤게모니 변동에는 매번 큰 역사적 이벤트가 있었는데, 이번 위기가 그 이벤트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지금 우리는 세기적 전환점에 서 있는 셈이죠."
- 그래도 중국이 헤게모니를 쥔다는 것은 좀 성급해 보이는데요.
"10년전 아시아 외환위기 때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 때는 IMF도 다분히 서방 지향적이었고 아시아 공동기금을 만들자는 논의도 미국의 반대로 치앙마이구상(CMI) 정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가 전세계 외환보유액의 60%를 쥐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경제위기가 왔을 때 대응이 가능하다는 얘깁니다. 반면 IMF는 2,000억달러 밖에 없어요. 결국 IMF나 브레튼우즈 같은 기존 금융질서는 큰 변화가 불가피 합니다. 대신 위안화의 역할, 아시아 각국 중앙은행들의 역할이 커질 겁니다. 1,2년 안에 큰 변화가 오리라고 봅니다."
- 위안화 중심의 세계가 온다는 말씀인가요.
"중국이 당장 전면에 나서지는 않을 겁니다. 최소 10~20년은 경제만 생각하는 나라로 갈 것입니다. 8억 농민, 2억의 절대빈곤층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는 정치적으로는 미국, 유럽에 대항하지 않으며 우선 아시아에서 헤게모니를 잡는 정책이 예상됩니다."
- 그렇지만 달러의 위력은 여전히 막강하지 않습니까. 금융위기로 미국경제가 망한다고 하는데도 달러화는 오히려 강세인데… 역설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달러패권체제가 견고하다는 방증아닌가요.
"맞아요. 만일 아시아에서 금융기관이 망하면 그 나라 환율은 폭락할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이 달러를 찍어내도 오히려 달러가 강세지요. 기축통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을 걸로 봅니다. 대략 4,5년 후 중국이 보유외환을 달러외 다른 통화로 다변화하기 시작하면 달러가치는 폭락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 중국의 헤게모니가 우리에겐 위기인가요, 기회인가요.
"중국은 우리에게 이미 이용할 대상을 넘어서 버렸습니다. 너무 커졌어요. 10년 전만 해도 한국은 중국 때문에 힘들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중국 때문에 한국이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함께 성장하며 정책적 조율이 필요합니다. 자유무역협정(FTA), 통화스와프 확대, 인력이동 자유화 등이 시스템적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요즘 같은 위기 때 금융ㆍ재정정책이 서로 어긋나지 않게 수시로 대화해야 하는 거죠."
- 국내 금융시장 얘기를 좀 해보죠. 환율 불안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데, 언제쯤 정상화될 것으로 보시는지요.
"올들어 원화 가치는 IMF 구제금융을 받은 헝가리 통화보다 두 배 이상 더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펀더멘털이 나빠서는 아닙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외국자본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과 달러와 관련 있는 기업들의 환헤지나 은행들의 단기차입이 한꺼번에 몰린 결과죠. 골드만삭스는 6개월후 원화 환율을 1,150원 정도로 봤는데요.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일시적인 수급 왜곡이 아직 풀리기 전이라서 불안한 겁니다."
- 결국 국내 주식시장에 외국인 비중이 너무 높아서 아닌가요. 주가가 오를 때는 그게 좋았는데, 요즘은 오히려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외국인 비중은 어느 정도가 적정선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흔히들 이머징마켓(신흥시장) 평균 비중을 얘기하는데 이머징 국가 중 우리처럼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가 몇이나 됩니까. 전반적인 투자 매력 등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고 또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도 없다고 봅니다."
- 이제는 금융위기보다 실물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더 높아지는 분위기입니다.
"결국 일자리 창출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금 상황에서 경제 살리기는 크게 두 가지 방법 중 선택의 문제입니다. 경상수지 흑자 정책을 쓴다면 환율이 1,000원대로 떨어지고 외환보유액도 늘어나겠지만 국내 소비는 크게 늘지 않을 겁니다. 한계가 있는 거죠. 지금의 외환보유액 규모 등을 감안하면, 오히려 어려울수록 일자리를 늘리는 정책이 더 중요합니다. 이를 통해 내수를 진작시켜야 합니다. 다만 소비를 위한 1회성 진작책은 안됩니다. 풀뽑기 시키고 일당 주는 식의 재정지출은 곤란합니다.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가장 유효적절해 보입니다."
- 예를 들면 대운하 같은?
" 그건 아마도 힘들겠죠. 반대가 많으니까."
- 금융통화위원도 지내셨는데요. 요즘 한국은행의 대응이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와 달리 중앙은행의 역할이 인플레 억제에 한정돼 있습니다. 경제성장과 금융시스템 안정까지 적극적으로 맡는 나라들과는 다르죠. 물가 측면에서는 4달 전만 해도 국제 원자재가 폭등과 원화가치 폭락으로 긴축적인 통화정책이 마땅했습니다. 지금은 그 때와 상황이 또 달라져 최근의 과감한 금리인하 정책도 잘 한다고 봅니다. 다만, 세계 상대국 중앙은행들과의 좀 더 긴밀한 협조 네트워크를 다졌으면 합니다".
- 특히 금리인하 타이밍이 한 박자씩 늦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물가 목표도 경제발전이라는 전제를 감안해야겠죠.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는 미국의 오바마 당선자에게 '취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하라. 그리고 거기에 50%를 더 하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극단적으로 하더라도 부작용은 적다고 보는 겁니다. 우리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봅니다. 바닷가 10m 지상에 집을 지어 놓았는데 100년 만에 15m짜리 해일이 몰아친 셈입니다. 극단적이라도 안 했을 때 생기는 부작용보다는 비용은 훨씬 쌀 것 같습니다."
- 이번 미국 투자은행(IB) 부실사태를 계기로 금융당국이 규제는 풀되 감독은 강화해야 한다는 말이 유행입니다. 그럴 듯한 얘기이긴 한데, 과연 가능할까요.
"우리 감독당국은 뭔가 문제가 터진 후에 개입해야 말이 없지, 미리 나서면 과도한 규제로 여길까 두려워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뭔가 자유화한다는 건 그만큼 방어벽을 충분히 쌓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아예 금융회사에 상주하며 매일 나오는 금융상품을 체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금융사들은 이를 절대 보여주지 않죠. 갓끈 매는 것처럼 보일까봐 농부에게 오이밭에 아예 들어오지 말라는 얘긴데요. 그게 과연 맞는 걸까요."
- FTA대책위원장도 하셨습니다만. 한미 FTA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미시건, 오하이오 등 미국 중부 자동차산업 지대의 지지를 얻어 당선된 오바마 당선자로서는 싫든 좋든 자동차산업을 옹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전체 제조업 비중이 17%인데 자동차만 5%일 정도니 자동차는 미국에서 이미 정치적 문제입니다. 먼저 비준해 놓고 국제적 신뢰를 깨지 말라고 요구하는 게 맞고 또 통하리라 봅니다. 오마바 입장에서도 협상 원칙을 깰 경우 세계 리더국가로서의 지위가 흔들릴 걸 잘 알 것이므로 당분간은 '지켜보자'는 전략을 쓸 걸로 예상됩니다."
■ 어윤대 전 총장은
학자이면서도 해박한 실무지식을 바탕으로 각종 정책 및 행정 업무에도 정력적으로 참여해 온 국내 1세대 국제금융 전문가다. 외환위기 직후 국제금융센터 초대 소장과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매각심사소위 위원장을 역임했고 정권을 막론하고 FTA, 국가브랜드 등 굵직한 국가적 프로젝트에 책임을 맡고 있다.
◇ 약력
▲1945년 경남 진해 생 ▲경기고ㆍ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미시간대 대학원 경영학 박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금융통화위원 ▲국제금융센터 소장 ▲고려대 15대 총장 ▲대통령자문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ㆍ정보통신부 미래전략위원회 공동위원장ㆍFTA국내대책본부 공동위원장 ▲현재 국가브랜드위원회 준비위원장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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