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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수련(睡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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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여는 아침] 수련(睡蓮)

입력
2008.11.1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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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창만

선정(禪定)은 조는 것

풀 끝에서 뿌리로

졸음을 밟고 내려가는 것

내려가 맨발로 진흙을 밟는 것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차지게 뭉개내는 것

물비린내 나도록

발자국을 지우는 것

지운 얼굴 위로 물을 채우는 것

물방개처럼 허우적대지 않고

구름의 실뿌리를 놓아주는 것

오후 두시에도 순례자를 맞는 것

그의 빈 꽃받침 위에 잠시 머무는 것

그의 친구의 꽃받침 위에도 나누어 머무는 것

이런 날은 늦게까지 하루를 놓아주는 것

그러나 잊지 않는 것

물마당을 쓸어놓고 어둠을 맞는 일

밤 깊은 실뿌리로부터 다시 밟는 일

정수리가 환하도록

밤새 진흙을 밟는 일

진흙을 밟고

아침 풀 끝에 올라앉는 일

마음 둘 곳 없을 때 호흡을 가지런히 하고 하나의 사물에 집중한다. 별이든, 연필이든, 창가에 붐비는 먼지든. 아니면 사무실 책상 위에서 말라 비틀어져가고 있는 탱자든.

돋보기에 햇빛을 끌어모아 종이를 태우는 놀이에 열중하던 어린 날처럼 흐트러짐 없이 한동안 잠자코 마음을 모으고 있으면 사물과 나 사이에 화락 불꽃이 이는 걸 경험할 수 있다. 그게 마음 수련이다. 마음에 수련 꽃송이를 매다는 일이다.

이런 방심의 시간은 조일 대로 조여진 하루를 모처럼 슬쩍 놓아줌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뿌리내린 연못 바닥의 진흙을 들여다보는 힘이 된다. 풀끝에서 실뿌리까지 환하게 깨어 있을 줄 아는 수련 위에 앉아 코 끝에 걸린 숨을 바라본다. 숨을 따라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오르내려 본다.

“물마당을 쓸어놓고 어둠을 맞”듯 맞아들인 졸음이 잘 우려낸 찻물처럼 맑다.

손택수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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